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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홍길동’, 이런 홍길동과 함께 율도국을 만들고 싶다
기사입력 :[ 2016-05-13 14:39 ]


조성희 감독의 스타일이 살아있는 영화 ‘탐정 홍길동’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탐정 홍길동-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은 독특한 영화이다. 할리우드 고전 느와르의 풍미에 우리나라에선 극히 구현하기 힘들었던 웨스턴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영화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떤 장르물로 규정짓기 몹시 힘든 영화이다. 차라리 장르를 ‘조성희 감독물’이라 말하는 편이 속편하다. 조성희 감독만이 구현할 수 있는 황량하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에 기괴한 순수성에 대한 편벽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 웰컴 투 조성희 월드

조성희 감독의 데뷔작 <남매의 집>은 단편이지만, 어떤 장편 슬러시 무비보다 참고 보기 힘든 영화였다. 악당들은 종잡을 수 없이 괴상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에 밀려드는 불안감은 좌중을 압도했다. 어쩌면 <퍼니 게임>의 부조리함에 비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퍼니 게임>보다 <남매의 집>이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은 괴롭힘을 겪는 주체가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아이들이 겪는 두려움과 죄의식과 결정불가능 상태를 지켜보면서, 미칠 것 같은 감정의 전이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꾀죄죄한 반지하 방에 놓인 남루한 아이들의 모습은 선뜻 감정의 전이를 일으킬 만한 대상도 아니다. 관객은 아이들에게 온전히 감정을 이입할 수도 없고, 멀찍이 지켜볼 수도 없는 분열적인 상태가 되어 황당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목도해야 했다. 괴상한 상황극을 통해 관객을 윤리적으로 고문하려는 악취미를 지닌 것은 아닐까, 감독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러웠다.

조성희 감독의 2010년 작품 <짐승의 끝>은 기괴함의 끝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한국의 시골을 배경으로 SF를 찍었으니, 말 다했다. 우주선이 나오냐고? 나올 필요가 없다. 택시 한 대면 충분하다. 황량한 시골길, 마음의 모서리가 살짝 깨져나간 듯한 사람 대여섯 명이면 범우주적인 스케일을 지닌 묵시록적인 영화를 찍을 수 있다. 더욱이 신약성서를 비튼 지독한 냉소주의는 너무 날카로워 가슴을 베일 지경이다. 마지막에 그 고통을 겪고 아기까지 빼앗긴 산모가 기껏 방두개짜리 집에 경차를 원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도저히 각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신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늑대소년>은 상업영화의 장 속에서 조성희 감독의 그로테스크함이 역으로 잘 활용된 사례이다. 원래 그로테스크함은 동화적인 상상과 굉장히 잘 맞아 떨어진다. 그로테스크함과 순수함은 동전의 양면이며, 모든 동화는 잔혹함과 기괴함을 지니기 때문이다. 역시나 시공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한국의 데데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여기에 서양 민담과 할리우드 영화 <가위손>의 서사와 한국의 정치적 억압을 살짝 겹쳐 놓으니, 상당히 그럴듯한 로맨스 영화가 만들어졌다. 관객들은 오랜만에 느끼는 순정한 감성에 젖어들었다.

<탐정 홍길동>은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1983년 강원도라고 시공을 못 박고 있지만 여전히 비현실적인 느낌의 배경에다, 한국의 홍길동 이야기와 할리우드 고전 느와르와 <씬시티>류의 과장된 비주얼을 얼개로 삼고, 여기에 한국의 정치적 억압을 겹쳐놓는다. 그 위에 <남매의 집>에서 구사하였던 ‘아이들’이라는 이질적인 주체를 끼워 넣고, 본 시리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반영웅의 ‘자아 찾기’가 가세한다. 그 결과 <탐정-홍길동>은 단순한 쾌감을 즐기는 장르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대단히 혼종적인 텍스트가 되었으며, 감독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인장처럼 품고 있는 ‘조성희표’ 영화로 탄생되었다.



◆ 홍길동의 세 가지 본질, 그리고 현대적 재해석

한국에서 탐정물이 많지 않은 것은 사설탐정 제도가 없는 현실과 관련이 깊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그림자 살인><조선명탐정><탐정-더 비기닝><검사 외전> 등의 영화에서 탐정의 활약을 그리거나 암시한다. 새로운 장르의 필요성 때문이다. <탐정 홍길동>은 아예 처음부터 주인공의 활동이 불법임을 전제로 한다. 주인공은 활빈당이라는 불법 흥신소 소속이며, 활빈당은 막대한 자금을 지닌 비밀조직이다. 흔히 홍길동이라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첫째 ‘호부호형’을 못하는 자이고, 둘째, 탐관오리를 혼내주는 자이며, 셋째 율도국을 건설하는 자이다. <탐정 홍길동>은 이러한 홍길동의 본질을 충분히 살리면서 현대적인 재해석을 가미한다.

첫째, ‘호부호형’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서출을 비롯하여 출생의 비밀이나 신분상의 불명확함 등을 말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주민등록이 없고, 기억이 없는 자이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부유하는 존재다. 고전소설 속 홍길동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자이지만, 현실에서 홍길동은 어느 관공서 문서에나 빈칸을 채우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디에나 있는 존재’이자 고유명사가 일반명사화 된 ‘익명의 존재’다. 그러니까 그는 ‘바람 같은 존재’다.



<탐정 홍길동>은 홍길동의 이러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다. 그는 무수히 많은 신분증을 갖고 다니며 자신을 설명한다. 구청직원, 검사, 강력계 형사, 안기부직원 등을 사칭한다. 말은 유려하고 빨라서 듣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다. 그는 뛰어난 관찰력, 기억력, 추리력, 그리고 거짓말 능력을 지녔다. 불법 탐정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재능이다. 그의 거짓말 능력은 ‘근본 없음’과 관련이 있다. 그는 아무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20년간 악몽을 꾸고, 엄마를 죽인 원수를 찾아다닌다. 그는 마음속에 깊은 우물이 있는 자로 인간에 대한 정이 없다. 악당의 가족을 인질로 삼거나, 악당들끼리 서로 손가락을 자르게 하는 행위는 그가 얼마나 잔학한 존재인지 알게 해준다. 그런 그가 복수를 위해 원수의 아이들을 달고 다니면서 측은지심을 지닌 존재가 된다.

영화 <탐정 홍길동>은 부유하는 반영웅인 홍길동이 원수를 갚기 위해 떠난 모험의 여정에서, 인간성을 지닌 존재이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인성과 자의식을 장착한다. 즉 영화는 반영웅이 영웅으로 거듭나는 성장극인 셈이다.

둘째, 홍길동이 속한 활빈당은 어떤 조직인가. 고전소설 속 활빈당은 부자의 재물을 훔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며, 탐관오리와 싸우는 조직이다. 활빈당은 구한말에 실제로 존재했던 화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의병을 잇는 농민조직이었다. 즉 홍길동의 역할은 단순한 잡범이나 조폭을 혼내주는 것이 아니다. 배트맨은 조커에 맞서지만, 홍길동은 악덕지주와 탐관오리에 맞선다.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며 정의를 구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탐정 홍길동>에서도 그가 대항하는 세력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권력형 조직범죄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악역의 존재는 매우 흥미로운데, 이들은 1983년을 배경으로 공포정치를 자행하는 군부 세력이다.



이들은 TV에 군복을 입고 나와 북의 도발을 경고하며, 무장공비 침투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자작극을 통해 권력을 쥐려 한다. 영화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역사적인 사실과도 맞아 떨어지지 않지만,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는 명확하다. 쿠테타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세력, 군부 내의 막강한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등이 자동으로 연상된다.

여기에 종교집단으로 출발하였으며, 그곳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이 자행되었다는 설명도 흥미롭다. 1980년대 오대양사건, 1990년대 영생교사건 등이 떠오르는데, 이들 사건은 구원파나 최태민 일가 등을 매개로 현재까지 회자되곤 한다. 영화 속 광은회의 본산이었던 폐건물의 위용과 그곳에서 벌어졌던 어린아이에 대한 학대 등은 형제복지회를 연상시킨다. 영화는 특정한 과거 사건을 적시하지 않지만,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온갖 음험한 사건들의 이미지를 재주조하여 광은회라는 권력의 실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공포정치를 근간으로 대형사건을 조작하여 권력을 쥐려는 세력이 1980년대에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광은회로 은유되는 악의 세력과 싸우는 홍길동의 활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셋째, 홍길동은 단순한 의적이 아니라, 율도국이라는 이상 사회를 만들었다. 즉 홍길동은 기존 권력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대안적 공동체 상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당연히 이념이 요구된다. 그가 제시한 율도국이 어떤 사회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율도국의 모습은 아직 드러나지 않는다. 홍길동이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광은회라는 권력에 맞서 마을사람들을 지켜내는 과정을 담은 이번 영화는 만약 시리즈가 계속된다면 ‘비긴즈’에 해당될 서막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홍길동이 아직 어떤 이상을 지니는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의 정서를 통해 유추할 수는 있다. 괴한들이 들이닥치기 전 손녀와 밥을 먹으며 어린 손녀의 얼굴에 붙은 콧물 묻은 밥알을 떼어 자기 입으로 가져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나, 피투성이로 죽어가는 할아버지의 손에 감긴 손녀의 머리끈이나, 고기도 못 사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죽은 할아버지에게 탕수육도 먹었으니 걱정 말라는 대답을 못했다고 우는 손녀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뭉클한 온기는 홍길동이 품게 될 이상사회의 맹아를 짐작하게 한다.

아이들은 홍길동을 의심하고 다그치면서도 어느 순간 그를 믿고 따른다. 그의 약에 묻는 흙을 털어주고, 캐러멜을 건넨다. 홍길동은 아이들을 처음 본 순간 “원수의 자식들”이라고 뇌까린다. 그가 거짓말로 꼬여 아이들을 차에 태운 것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잔혹한 의도였다. 그러나 그의 초기 심정은 아이들과 감정을 쌓으며 원인 소멸된다. 결정적인 순간 그가 아이들에게 증오의 말을 털어놓을 때, 아이들은 물론 홍길동이나 관객까지 흠칫 놀라게 된다. 그 말이 진실이기에는 그동안 쌓아 온 감정이 너무 여러 겹인 것이다.



영화는 홍길동과 마음을 나눈 아이들과 이들 일행에게 아무 조건 없이 선의를 베푸는 마을사람들을 통해 율도국이 어떤 모습일지 암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마을 사람들이 다함께 모여 영화를 보고, 다음날 평이한 일상을 맞는 모습도 상당한 감흥을 안긴다. 그들에게 어떤 미래가 예정되어 있었는지를 알기에 더욱 그렇다. 공포정치의 희생양이 되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맞는 평화로운 일상, 이것이 율도국의 이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상사회는 거창한 쾌락이 넘치는 사회가 아니라, 민생과 안전과 평화와 공동체의식이 유지되는 사회다.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홍길동과 아이들이 캐러멜을 하나씩 나눠 먹는 장면이 어쩌면 율도국에 대한 가장 단적인 예시일 수 있다.

<탐정 홍길동>은 대단히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영화이다. 탐정물, 느와르, 웨스턴의 풍미를 갖고 있는데다, 냉혹하면서도 기묘하게 ‘츤데레’ 스러운 홍길동이 지닌 강한 개성, 그리고 조성희 감독 특유의 ‘아이들’이라는 마성의 존재가 빚는 앙상불이 상당하다. 영화는 단순한 장르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악한 권력의 존재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부디 도식적인 제목과 통속적인 포스터가 은폐하고 있는 ‘조성희 월드’의 위엄을 놓치지 마시라.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탐정 홍길동>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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