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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 강부자의 연륜을 이렇게 소비해버리나
기사입력 :[ 2011-10-26 10:00 ]


“내 어제 그만큼 일렀거늘 여기가 어데라고 또 얼굴을 들이미는가 말이다. 니 나하고 한판 붙자는 얘긴가. 놔라 이 늙은이가 빠져줄끼니 이 집에서 니들 맘대로 하고 살거라. 내는 더는 저 놈 면상을 못 본대이. 저 놈만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단 말이대이.”

- MBC <불굴의 며느리>에서 최막녀(강부자)의 한 마디


- ‘불굴’ 최막녀, 편협한 노인으로 그려야만 했나?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300년 된 종가 ‘만월당’ 여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MBC <불굴의 며느리>가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때 내심 집안의 큰 어른이신 11대 종부 최막녀(강부자) 할머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워낙 어른다운 어른이 드물어진 시절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와 현실 중 누가 더 막장인지 앞 다퉈 내기라도 하듯 혼란한 세상인지라 TV에서나마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

어언 반세기를 넘어 갖은 풍파를 헤치며 꿋꿋이 종가를 지켜온 최막녀 할머니라면 그 누구보다 심지가 깊고 굳으실 터, 사람의 도리며 믿고 따라야 할 바를 조목조목 일러주시지 싶기도 했고, 강부자 씨의 연기자로서의 연륜에 대한 믿음 또한 컸다. 위엄 있고 기품 있는, 그리고 자애로울 땐 한 없이 자애롭고, 단호할 땐 칼 같이 단호한 종갓집 노 할머니로 이보다 잘 어울릴 연기자가 있을까? 강부자 씨가 MBC <고맙습니다>에서 보여준 소탈하고 정겨운 느낌의 할머니와 SBS <불꽃>에서의 온화하면서도 한편으론 불같은 성정을 지녔던 시어머니가 합쳐지면 제격이겠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만월당’이라는 고택의 은은한 정취며 전통 있는 종갓집 살림살이와 예의범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채로운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모처럼 풍성한 에피소드들이 나와 주겠거니 했거늘 웬 걸, 그 좋은 소재는 집안 여인네들의 갖가지 사랑 얘기에 가려져 어느새 빛을 잃고 말았고 종갓집 어르신으로서의 품격에 대한 기대 역시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극 초반에는 그나마 자상하면서도 정갈한 면모의 할머니였으나 손자며느리 오영심(신애라)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여지없이 시어머니 근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 있는 문중의 큰 어른답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보여주셨으면 좀 좋았겠는가. 전 바구니를 뒤엎으며 오갈 데 없는 영심을 야멸치게 내쫓던 날도 너무하시다 싶었지만 특히나 죽은 손자(윤다훈)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 놓고는 손자며느리가 남편 생일을 잊었다고 비죽비죽 눈물 바람을 해가며 심통을 부릴 때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당신에게는 금쪽같은 손자였다 해도 영심을 헌신짝 같이 내버린 인물이라는 사실을 잊으셨을 리 없건만, 이 무슨 경우 없는 처사이신가 말이다.






물론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어린 아들 딸을 데리고 한 해에 수십 번이나 되는 제사를 받들며 문중을 지켜왔거늘 자신만으로는 부족해 며느리며 손자며느리까지 줄줄이 과부가 되는 꼴을 봐야 했으니 심사가 꼬였을 만도 하다. 할머니의 가슴 속엔 타버린 재만 오롯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돌아가라 했고 위기의 순간일수록 집안의 어른이 중심을 잡아주셔야 옳지 않겠는가. 손녀(이하늬)나 딸(임예진)의 혼사라면 반색을 하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사별한 며느리들의 일이라면 같은 상황임에도 앞뒤 가리지 않고 노발대발 하는 이중성이 차마 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서운하신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편협한 노인으로 그려야만 했을까?

안타깝게도 최막녀 할머니의 요 근래 대사는 태반이 ‘나가라’다. 평생을 믿고 의지했던 며느리 차혜자(김보연)조차 첫사랑과 다시 만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데, 어머니 품을 떠나지 않겠다는 확답을 기어이 받아 놓고는 당사자인 장석남(이영하)이 찾아와 통사정을 할 때마다 “퍼뜩 나가거라. 내 집에 무슨 볼 일로 또 찾아왔느냔 말이다. 니는 내 며느리를 훔쳐 갈라 하는 도둑이다.”하며 종주먹을 들이대곤 한다. 딸의 배필로 여겼을 적엔 그처럼 극진하니 살갑게 대하던 석남에게 이젠 소금 세례며 마른고추를 뿌려대며 문전박대를 하다못해 며칠 전엔 끝내 보따리를 싸들고 마당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내가 이 집을 떠날 테니 너희들끼리 잘 살아보라는 어깃장이시다.

이 어른이 언젠가는 고집을 꺾고 며느리의 사랑을 인정하리란 걸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극 전개상 갈등을 유발시킬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모두가 행복한 마무리라고 해서 이미 추락해버린 이미지가 회복될 수 있을까? 언젠가 불어오는 바람 끝에 가을 냄새가 난다며 쓸쓸하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짓던 최막녀 할머니 얼굴이 생각난다. 왜 이 정감 있는 인물을, 연륜 있는 한 연기자를 이렇게 소비해버리는 것인지, 가슴 답답하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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