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세 명의 10대 여가수에 대한 기억 (A)면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어느 날 문득 사람들은 머릿속에 있는 기억의 녹음테이프를 꺼내본다. 1978년의 기억, 1988년의, 1999년, 2012년에 이르기까지 기억은 녹음된다. 그것은 딱딱한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저장되지는 않는다. 가까웠던 친구나 사랑했던 연인의 목소리,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낯부끄럽지만 진지했던 내면의 목소리가 남아있기도하다. 혹은 당시 즐겨듣던 유행가들도 기억의 녹음테이프엔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 함께 지난 시절의 기억 녹음테이프 하나를 꺼내 다시 되감아 보자. 테이프에 적혀 있는 년도는 1988년이다. 기억을 재생시켰을 때 먼저 흘러나오는 노래는 올림픽 주제곡이었던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다. 이어 레슬리 만도키와 에바 선이 함께 불렀던 ‘Korea’라는 팝송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 테이프에는 올림픽과 상관없이 길거리 어디서나 흘러나오던 ‘담다디’나 ‘난 사랑을 아직 몰라’ 같은 노래들도 함께 담겨 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1988년 제24회 올림픽이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렸다. 그해, 8월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열린 <88 서울올림픽 30일 전 축제>에는 1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인기가수는 물론 외국의 스타들까지 출연한 대규모 쇼였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지만 당시 일본의 마돈나로 불리던 혼다 미나코나 일본 아이돌 그룹의 원조인 소녀대의 무대도 감상할 수 있었다.

<88 서울올림픽 30일 전 축제>에는 세 명의 10대 여가수의 무대도 있었다. 말 그대로 어디서 저런 물건이 나타났나 싶은 꺽다리 이상은은 쇼의 초반부에 등장했다. 8월초에 ‘담다디’로 강변가요제 대상을 받았으니 그날 쇼에서 공연한 가장 햇병아리 가수였던 셈이다. 이지연과 김완선은 쇼 중반부 즈음에 합동공연을 펼쳤다. 당시 유행하던 에어로빅 팬츠 차림이었다. 김완선은 붉은색과 형광색이 어우러진 원색의 옷을 입었다. 양 손목에 한 아대 역시 한쪽은 붉은색 나머지 한쪽은 형광색이었다.

이지연은 검정 에어로빅 팬츠에 오륜기가 그려진 희색의 소매 없는 셔츠를 걸쳤다. 두 사람이 함께 노래를 부를 때는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경쾌한 노래를 불렀지만 빗속의 공연은 어딘지 안쓰러웠다. 그 와중에서도 김완선은 덤블링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춤을 추었다. 이지연은 특유의 그 표정, 울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은 얼굴로 노래를 불렀다.

섹시함, 청순함, 보이시. 10대의 나이에 데뷔해 서로 다른 독특한 매력으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짧은 전성기를 맞았던 세 여가수들은 그 후 새로운 길을 걸어갔다. 자유를 찾아, 삶을 찾아, 영혼을 찾아.

세 명의 여가수는 86년부터 88년까지, 각기 1년 차이로 데뷔했다. 공교롭게도 모두 한 살 차이였다. 데뷔시절 나이를 속였지만 김완선은 1969년생, 데뷔는 가장 늦었지만 이상은이 1970년생, 이지연은 1971년생이었다. 이들이 스타로서 가장 빛났던 때는 데뷔순서와는 반대로 이상은이 88년, 이지연이 89년, 김완선이 91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빛났던 때와 상관없이 10대의 세 여가수가 한국 가요계에 남긴 흔적은 꽤 큰 편이었다. 김완선, 이지연, 이상은 모두 그 전까지 한국 가요계에서 찾아볼 수 없던 유형의 스타들이었다.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여가수에게는 어떤 전형적인 틀이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노래를 잘 하는 디바형 가수라는 점이었다. 현미, 패티킴, 이미자, 김추자, 이은하, 혜은이, 윤시내, 정수라, 이선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일단 모두 노래를 잘 하는 가수였다. 반면 김완선, 이지연, 이상은은 달랐다. 그들은 음악과 어우러진 이미지를 무대에서 연출하는 가수였다.



최초의 비디오형 가수라고 평가받는 김완선이 특히 그랬다. 춤과 무대와 눈빛을 빼놓고 김완선의 노래들을 따로 말할 수 있을까? 저예산으로 연출한 티가 나는 그녀의 첫 뮤직비디오 ‘오늘 밤’은 하지만 김완선만으로 모든 걸 다 용서하게 한다. 춤추는 가출소녀가 밤거리 이곳저곳을 떠도는 것 같은 분위기의 비디오는 촌스러운 화면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김완선에게 눈을 떼기가 힘들다.

신중현의 명곡 ‘리듬 속의 그 춤을’ 역시 어깨를 튕기며 웨이브를 하는 김완선을 생각 않고서 이 노래만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그 중에서도 특히 김완선에게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5집의 ‘나만의 것’.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무도회’로 이어지는 시절의 무대 장악력은 대단했다.

‘나만의 것’은 기존의 김완선 노래와는 다른 리듬감 있는 발라드곡이다. 이 곡에서 보여준 김완선의 세련되고 여성스러우며 우아한 안무는 듣는 발라드가 아닌 보는 발라드의 매력을 살려주었다.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는 김완선의 모든 장점이 살아 있는 무대였다. 토끼춤에서 자유로운 웨이브로 이어지는 안무, 듣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함께 호흡하는 자연스러운 무대매너, 그리고 10대 중반부터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백댄서로 활동하며 무대에서 살아온 그녀 자신을 드러내는 듯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의 노랫말까지. 이 노래가 김완선의 대표곡이 된 이유는 충분하다.

‘가장무도회’는 신나는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의 무대와 반대로 세련되고 절제된 무대를 연출했다. 발랄함과 섹시함은 그 후 여러 댄스 여가수들이 보여주었지만 ‘가장무도회’의 차가운 시크함을 따라올 무대매너는 아직까지 보지 못한 것 같다.

그 후, 김완선은 대만에 진출 그곳에서 큰 인기를 얻는다. 반면 한국에 돌아온 이후 그녀의 행보는 반짝 인기만 얻었을 뿐 큰 빛을 보진 못한다. 2천년대 중반 유투브 시대가 열리면서 김완선은 자주 인터넷에서 거론되었다. 바로 동영상을 통해 과거 그녀의 전설적인 무대들을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1년 김완선은 다시 가수로 컴백한다. 그리고 전성기 시절 매니저인 이모에 의해 무대 위 인형처럼 살아왔던 과거를 고백했다. 화려했지만 자유가 없어 불행하게 여겨졌던 시절을. 지금의 김완선은 과거의 김완선과는 달라 보인다. 그녀는 무대를 정말로 즐기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긴 공백 이후 그녀가 찾은 것은 스스로 춤추며 노래할 수 있는 자유였다.

1988년의 녹음테이프에 담겨 있는 김완선의 히트곡은 ‘나 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다. 이장희가 만들어 준 이 곡은 댄스곡이지만 그리 신나는 곡은 아니었고 큰 인기를 끌지도 못했다. 게다가 1988년은 그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닌 두 명의 신인여가수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해였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지구레코드, 마리끌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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