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원작과 비교 통해 본 화려한 개성의 충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원작은 정세랑의 동명장편소설이다. 연결되는 단편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형식이니 연작소설이 더 정확한 설명이겠다. SF/판타지 장르에서는 픽스업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이 형식을 그대로 유지해 다양한 러닝타임의 단편과 중편들이 공존하는 시리즈를 만들었어도 재미있었을 것이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는 에피소드당 러닝타임에 융통성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드라마는 50분 전후의 에피소드 6회 형식으로 나왔다. 영국 드라마 1시즌 분량이다. 매 에피소드가 클리프행어로 끝나는 논스톱 구성 때문에 이 시리즈의 리듬은 1930년대 미국 연재 영화와 비슷하다. 원작과는 달리 6회 전편을 커버하는 음모론이 들어갔고 이 때문에 조금 미드스러워졌다. 원작이 가진 다양한 톤은 희생될 수밖에 없는데 이건 좀 아쉽다.

원작자 정세랑과 감독 이경미의 만남은 발표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 주연배우 정유미가 가세하자 더 재미있어졌다. 정유미가 정세랑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 이경미가 감독한 드라마의 주연을 맡는 건 모두 상상 가능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어느 지점에 설 것인가.

많이들 정세랑 월드와 이경미 월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 두 세계는 정말로 다르다. 원작의 안은영이 사는 정세랑 월드는 선량함과 일상성에 바탕을 둔 안정적인 곳이다. 아무리 이상하고 나쁜 일들이 연달아 터져도 일상은 쉽게 깨지지 않고 인간의 선량함에 대한, 안정적인 이성애 연애에 대한 기대는 남는다. 하지만 이경미 월드에서 세상은 원래 난폭하고 무서운 곳이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주인공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 이상해지고 난폭해질 수밖에 없다. 원작자가 직접 참여한 각색 과정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개성의 차이는 단순한 타협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고.

결과만 말한다면 <보건교사 안은영> 드라마는 원작의 재료들을 가져와 이경미식으로 완전히 재해석한 작품이다. 클래식 피아노곡의 광폭한 재즈 편곡을, 멋대로 원색의 크레용 덧칠을 한 고전 드로잉을 생각해보라. 어떤 시청자는 원작의 마라맛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그럴싸하게 들린다.

정유미의 안은영도 거의 완벽한 이경미 주인공이다. 정세랑의 독자들은 별 어려움 없이 안은영을 이해하고 그 내면에 들어가며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도 이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우린 드라마 안은영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엔 계속 ‘그러나’와 ‘그런데’가 붙는다. 정유미가 연기하는 안은영은 ‘나’를 그대로 투영할 수 있는 대상보다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단짝 친구 같다. 진짜 친구라면 ‘내가 아니면 누가 얘를 챙겨주겠어’라는 생각이 들 법한. 이 캐릭터가 소개되는 1, 2부에서는 좀 무섭다. 밤길을 걷다가 마주치면 주저없이 달아나고 싶겠다. 더 뱀파이어스러워지기도 했다. 남주혁이 연기하는 한문선생 홍인표의 기를 빌리는 장면에서 정유미는 정말로 약탈자 같은 표정을 짓는다.

드라마의 세계 묘사도 원작보다 훨씬 냉정해졌다. 원작에서는 정말로 나쁜 사람들은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전지적 화자가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해가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 이건 책이 친절하고 선량하고 낙천적이어서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나쁜 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에는 그런 안전지대가 없다. 아이들과 선생들은 편견과 혐오에 익숙해져있고 학교 폭력은 일상이며 어떤 사람들은 이유와 상관없이 그냥 끔찍하다. 이는 안은영의 비비탄총과 야광검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건 떼어낼 수 없는 우리 세계의 일부이다.

이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게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원작에 잠시 언급되는 동성애 혐오 폭력사건을 다룬 부분이다. 원작보다는 강도가 낮아졌다. 집단 폭력 대신 난투극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원작에서와는 달리 드라마에서는 동성애 커플, 다양한 혐오 발언을 하는 아이들은 모두 얼굴과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앞 에피소드들을 거치면서 우리가 친근함을 쌓았던 애들이다. 원작의 막연한 추상성은 날아가버린다. 학교 지하실의 무언가가 이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들의 혐오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안전지대가 없는 건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원작에서 홍인표는 이 사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리버럴한 지식인답게 고상한 분노를 터트린다. 드라마의 홍인표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동료 선생들로부터 노골적인 장애혐오가 날아든다. 드라마에서는 인표의 장애가 원작에서보다 훨씬 깊게 다루어지는데 이는 영상 각색물의 장점이다.

소설과 드라마를 비교한다면 드라마 쪽이 내가 아는 세계와 더 가깝다. 소설의 세계는 초자연적인 괴물이 날뛰는 동안에도 일상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상성은 이상과 소망을 반영한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하지만 그 세계를 구성하는 재료는 현실적이다. 특히 고등학생 아이들의 묘사가 그렇다. 이들은 어느 누구도 한국 드라마 고등학생의 예쁘장한 전형성을 따르지 않는다. 광폭하고 어리석고 어처구니없고 위험하고 대체로 방사능을 띈다. 비교한다면 이들 중 여자들이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얼굴을 보여주는데, 이 역시 이경미 월드의 특성이다.

호오가 갈릴 수밖에 없다. 드라마는 정세랑의 원작이 주었던 많은 것들을 주지 않는다. 정세랑과 이경미 모두가 취향이 아닌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최근 나온 한국 문학 각색물 중 이 넷플릭스 드라마만큼 화려한 개성의 충돌을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는 것이다. 이 원작으로 모두가 만족하는 무난한 드라마를 만드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재미겠나.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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