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가장 편안해야할 사람, 공간이 공포로 변할 때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집이나 잠만큼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있을까. 스트레스 가득한 바깥에서도 돌아와 문을 닫으면 나와 가족만의 편안한 세계가 펼쳐지는 집이 있고, 하루 종일 피곤한 삶에도 이를 잠시 멈춰주는 잠이 있어 하루하루를 버텨낼 힘을 얻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바로 그 편안함을 책임져주는 것들이 깨져버린다면 어떨까. 유재선 감독의 영화 <잠>은 바로 그 지점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누군가 들어왔어.” 잠을 자던 남편 현수(이선균)가 그렇게 말할 때 그걸 본 수진(정유미)은 어딘가 섬뜩하면서도 잠꼬대 정도로 치부하지만, 남편의 수면 중 이상행동은 점점 선을 넘는다. 얼굴을 심하게 긁어 피가 날 정도의 상처를 내고, 냉장고를 열고는 생고기를 먹기도 하고, 아무 곳에나 오줌을 싸기도 한다. 그러다 심지어 반려견까지 죽여 냉동고에 넣어 버리는 사건까지 벌어지자 수진은 공포에 휩싸인다.

보통 공포영화에서 이런 위험에 마주한 인물들은 도망치는 게 다반사지만, 수진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는 가훈처럼 도망치기보다는 맞서서 함께 이 문제를 이겨내려 한다. 하지만 아이를 출산하고 나자, 남편의 수면 중 이상행동이 주는 공포는 더 강렬해진다. 아이를 어떻게라도 할지 모른다는 의심이 생겨나고, 산후 우울증까지 겹쳐지면서 수진의 불안에 의한 방어기제는 도를 넘는다.

영화는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어느 정도 예상하고 나면 그 예상을 넘는 전개로 관객들을 계속 빠져들게 만든다. 1부를 보고나 면 남편의 수면 중 이상행동이 만들어내는 공포를 그린 작품이라 생각하게 되는데, 2부에 수진이 아이를 낳고 나서는 그 공포가 점점 증폭되고 3부에는 불안이 극점에 오른 수진의 돌변이 더 큰 공포를 만들어낸다.

수면 중 이상행동을 하는 현수로부터 시작해 벌어진 부부의 사투를 그리고 있지만, <잠>에는 이 부부의 심리적 상황을 통해 현대인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담아낸다. 단역배우로서 주목받지 못하고 그래서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남편의 불안한 심리가 그것이고, 이제 출산을 통해 변화할 부부의 관계에 대한 우울증과 불안감이 겹쳐져 있는 아내의 심리가 그것이다. 여기에 층간소음이 들릴 정도로 가까이 지내는 이웃 또한 불안의 요인이기도 하다.

‘빙의’라는 개념을 수면 중 이상행동, 연기 그리고 무속으로 꿰어낸 점 역시 <잠>이 주는 섬뜩한 공포의 탁월한 지점이다. “누군가 들어왔어”라는 잠꼬대 같은 말은 처음에는 남편이 맡은 단역의 대사라고 여겨지지만, 어느 순간 귀신이 들어온 거라 믿어지는 오컬트적 공포로 바뀌고, 그걸 실제라 믿고 남편 안에 든 귀신을 물리치겠다며 칼까지 들고 나서는 아내 앞에 현수는 ‘빙의된 연기’를 통해 아내의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 남편이 연기자라는 설정은 그래서 거의 집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만을 다루지만, 다채로운 서사와 해석이 가능하게 만든다.

특히 편안한 일상이 깨지는 공포를 그리는 <잠>이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 데는 이선균과 정유미의 지분이 상당하다. 즉 두 사람 모두 편안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 그 편안함이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뀔 때의 섬뜩함이 배가 됐다는 것이다. 평범한 부부의 낮과는 전혀 다른 밤이 양극단의 대비를 통해 공포를 주듯이, 편안한 두 배우의 얼굴이 어느 순간 싹 변하면서 극단적 클로즈업 같은 카메라 연출에 포착되어 스크린 가득 채워질 때 공포감은 더욱 커진다.

실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하는 공포영화들과 달리, <잠>은 직접 그 장면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런 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걸 상상하고 의심하게 하는 방식을 쓴다. 귀신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진짜 귀신이 등장하지는 않음으로써 더 무섭다고나 할까. 또 <잠>은 공포영화지만 우리가 사는 일상에 깃든 불안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파국들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제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잠>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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