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보다 공연이 더 풍성했던 설 예능

[엔터미디어=최영균의 듣보잡(‘담하기)] 명절 TV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파일럿 예능이다. 방송사가 새롭게 기획하고 준비해온 프로그램들을 선보이고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펴 정규 편성을 결정짓는 테스트 성격이 있어 흥미롭다. 어떤 프로그램이 정규 방송의 기회를 차지할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고 파일럿들의 양상을 보다 보면 예능의 유행 흐름도 가늠해볼 수 있다.

지난해 설과 추석 파일럿은 전반적으로 빈약했다. 설은 짧은 연휴로 인해 파일럿을 시도하기보다 기존 정규 예능들을 그냥 방송하는 경우가 많았다. 추석에는 KBS는 설에 이어 별다른 파일럿을 선보이지 않았고 MBC가 그나마 시도한 라면 소재 쿡방은 SBS의 비슷한 라면 레시피 예능과 겹치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그나마 SBS가 음악과 추리를 결합한 <방콕떼창단>이나 인테리어 고수 스타들의 팁과 트렌드를 랜선으로 소개하는 <랜선 집들이 전쟁-홈스타워즈> 등 새로운 기획에 적극적이었다. 지난 명절 파일럿의 위축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소재에 제한이 많아진 결과이자 지상파 방송사들의 전반적인 침체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설 파일럿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설과 추석에 비해 신선한 시도들이 좀 늘었지만 프로그램 수는 여전히 적었다. 물론 MBC<심야괴담회>, <배달고파-일단시켜> 등 새해 들어 잇따라 파일럿 예능을 공개하는 등 방송사들이 명절과 상관없이 수시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는 경향이 늘고 있어 이번 설 파일럿의 축소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이번 설 파일럿에는 눈길이 가는 시도들이 있었다. 최근 예능 트렌드가 인기 포맷들을 결합해 호소력을 높이는 경우가 많은데 정리와 관찰 예능을 결합한 MBC <사진정리서비스-폰클렌징>(이하 <폰클렌징>)이나 여성 예능과 스포츠를 결합한 SBS<골 때리는 여자들>(이하 <골때녀>)이 그러했다.

<폰클렌징>은 휴대폰 속 사진들을 정리해주는 프로그램으로 tvN <신박한 정리> 등 최근 관심을 모은 집 정리 포맷의 휴대폰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정리의 대상이 사진이라 윤종신의 휴대폰 속 여행 기록은 여행 예능, 김성은의 가족 사진들은 육아 예능 등 전반적으로 관찰 예능의 범주에 묶을 수 있는 재미들을 맛볼 수 있었다.

<골때녀>는 모델, 개그우먼, <불타는 청춘> 멤버, 전직 선수와 국가대표 가족 등 여성 셀럽 4팀이 축구대회를 벌이는 이야기이다. 지난해 <갬성 캠핑>, <노는 언니>, <나는 살아있다> 등 여성 멤버들로만 구성된 예능과 <뭉쳐야 찬다>, <핸섬타이거즈>, <축구야구말구> 등 스포츠를 포맷으로 한 예능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 둘을 합친 포맷을 시도했다.

결합이라고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KBS <류수영의 동물티비>도 기존의 동물 예능과 시사 다큐멘터리의 혼성 느낌 파일럿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동물의 이야기부터 외면하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까지 폭넓게 다루는 새로운 동물 프로그램을 표방했는데 인간과 동물의 공존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유기묘 문제의 경우 이들을 챙기는 부부의 이야기와 함께 유기묘를 불편해하는 마을 사람들의 불만을 균형 있게 다뤘다. 유기견 구출과 보호의 아이템도 방송하면서 들개들이 입히는 피해의 문제도 다루는 등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고 많은 생각이 필요한 일임을 보여줬다.

이번 설 예능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파일럿이 줄어든 가운데 그 빈자리를 공연이 채우는 분위기였다. 지난해 추석, 신드롬을 일으킨 <2020 대한민국어게인 나훈아>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을 즐기고 감상할 프로그램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눈에 띄었다.

과거에도 명절에는 국악이나 트로트 공연 프로그램이 꽤 편성됐지만 주력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라임타임 때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훨씬 업그레이드된 국악과 트로트 공연이 방송됐고 다양한 장르도 만날 수 있었다. KBS는 나훈아 공연 제작팀을 그대로 투입한 <조선팝 어게인>으로 명절 특집 콘서트의 주도권을 이어가고자 했다.

국악에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이날 공연에는 이날치 밴드, 김영임, 송가인, 조유아, 서진실, 송소희, 포레스텔라, 악단광칠 등이 등장해 나훈아 공연 때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CG와 특수효과, 그리고 온택트 관객 참여 시스템 등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KBS는 공연 형식은 아니지만 노래를 연기와 함께 즐길 수 있어 공연의 성격도 지닌 뮤지컬 드라마 <구미호 레시피>도 선보였다. 전주한옥마을에 사는 천년 구미호의 판타지를 특이하게 국악 음악의 뮤지컬로 다뤘다. MBC<설특집 트로트의 민족 갈라쇼>를 비롯해 트로트 관련 공연 프로그램들도 최근 트로트 장르가 대세가 된 상황을 입증하듯 자주 눈에 띄었다.

SBS는 가요사를 정리하며 최근 관심을 모은 프로그램 <아카이브K>의 관련 가수 12팀의 공연을 담은 <전설의 무대-레전드12>를 선보였다. 성시경, 변진섭, 백지영, 폴킴, 박미경, 김종국, 데이브레이크, 잔나비, 양희은, 김필, 김현철, 김광민 등이 등장한 이 프로그램은 MBCKBS의 공연 프로그램들과는 또 다른 색깔로 이번 설의 공연 방송을 풍성하고 다채롭게 만들었다.

<조선팝 어게인>7.5%(이하 닐슨코리아), <전설의 무대-레전드12>4.2% 등 공연 방송들이 시청률에 있어서도 선전한 편이라 향후 명절 예능의 흐름에서 공연 프로그램의 비중이 계속 높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코로나19 시대 실제 콘서트를 보기 힘든 상황에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일 수도 있어 명절 예능이 파일럿에서 공연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해 갈지는 일단 다음 추석까지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최영균 칼럼니스트 busylumpen@gmail.com

[사진=KBS, S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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