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리플리 증후군에서 한 여성의 생존기로

[엔터미디어=정덕현]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안나>는 그런 내레이션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애초부터 정해진 이 한 여성의 엔딩이었다. 자동차 사고, 아무도 없는 사막, 피 흘리며 차에서 내린 유미(수지)가 스카프를 풀어 핸드백에 감싼 후 불을 붙여 차 안에 던져 넣는 모습은 그가 해온 ‘거짓’의 대가가 어떤 것인가를 시작부터 알려준 바 있었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려 학창시절부터 대학입시에 실패하면서 처음 거짓말을 했던 그 시점부터 틀어져버린 이 여성의 서사를 들려줬다. 훗날 그가 말했듯 독립은 부모님의 실망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부터가 시작되는 것이었지만, 그는 그 때 그 기대에 가득 찬 부모님들이 실망할까봐 대학에 붙었다 거짓말을 했고 거기서부터 그의 삶은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마레 갤러리에서 현주(정은채)를 만나고 뭐든 다 가진 듯한 그 삶이 부러워 그 이름과 학위를 훔친 후, 최지훈(김준한)을 속여 결혼을 하고 교수로 유망한 사업가에 정치인인 남편의 아내로 살게 됐지만 그는 그 지점에서 알게 된다. 거짓으로 채워 넣은 자신이 빈껍데기만 남은 허망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걸. 사람이 진짜 원하는 건 가진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유미는 알게 된다. 자신이 가진 그것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건 아니었다는 걸.

<안나>가 흥미로웠던 건 이러한 리플리 증후군의 소재를 가져왔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현실들, 이를테면 스펙사회나 수저로 미래가 결정되는 불공정한 사회 같은 것들을 담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최지훈 같은 앞에서는 약자를 대변하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갑질을 일삼는 표리부동한 인물을 통해 거짓이 유미 같은 이만의 특별한 일탈이 아니라,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이 사회의 또 다른 민낯이라는 걸 그려냈다.

결국은 유미의 정체를 다 알게 된 최지훈은 자신의 정치 행보를 위해 그 거짓을 숨기고 원하는 것을 얻게 되지만, 이들의 거짓된 삶은 저마다 대가를 치르게 된다. 유미가 치른 가장 큰 대가는 요양원에서 죽어가던 엄마를 끝내 찾아가지 못하고 최지훈과 미국행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거짓으로 숨겨 모든 걸 얻은 것처럼 보였지만 남편이 괴물이었고 결국 엄마의 부음조차 챙기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

최지훈은 늘 그래왔듯이 이용해먹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죽이는) 걸 유미에게도 하려다 결국 자신이 그렇게 버려지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거짓의 삶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가를 <안나>는 먼 길을 돌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또 버텨나가는 유미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진실은 간단하고 거짓은 복잡합니다.” 첫 장면에서 보여준 엔딩장면으로부터 시간을 되돌려 어디서부터 왜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준 드라마는 ‘거짓’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된 유미의 삶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가를 말해준 것이었다. 그렇지만 드라마는 그렇게 리플리 증후군을 가진 인물이 파국을 맞이하는 엔딩으로 마무리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남겨진 유미의 또 다른 내레이션이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게 견디면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항상 그랬어요. 난 마음먹은 건 다 해요.” 이 내레이션이 말해주는 건 <안나>의 서사가 그저 거짓의 삶을 산 자의 파국만이 아니라, 그가 그런 선택들을 하며 살아낸 삶이 일종의 생존기였다는 걸 드러낸다. 그것이 결코 옳은 삶은 아니지만, 저들에게만 주어진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했던 일련의 생존이자 버텨내는 과정이었다는 것.

<안나>의 엔딩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유미의 파국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그걸 생존기의 서사로 틀어 놓음으로써 그를 그렇게 만들어낸 현실을 반추하게 만들었다. 그를 둘러싼 현주나 최지훈 같은 괴물들이 사는 현실. 그래서 피를 흘리며 비틀비틀 되면서 불붙은 핸드백을 차 안에 던져 넣고는 홀로 걸어 나가며 오열하는 유미의 얼굴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그게 마치 거짓을 통해서라도 버텨내며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피 흘리는 얼굴들을 대변해주는 듯해서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쿠팡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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