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끝낸 ‘파친코’, 우리가 선자에게 빠져들었던 건

[엔터미디어=정덕현] “근데 저 정말로 빨간 실타래를 집었어요?” 노아는 자신이 돌잡이 때 빨간 실타래를 잡았다며 실망한다. 실타래는 장수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게 노아에게는 영 재미가 없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활이나 화살을 잡아야 했다며 노아는 동생 모자수가 돈 많이 벌게 엽전을 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노아의 아버지 이삭(노상현)이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노아야. 오래오래 산다는 건 훨씬 대단한 일이야.”

오래오래 산다는 것. 어쩌면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바로 이 지점을 짚어내고 있어서일 게다. “역사가 우릴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이민진 작가의 원작 소설 첫 문장에 담겨진 것처럼, 192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넘어온 한인들이 1980년대까지 살아온 이야기의 핵심은 ‘살아남는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진정 대단한 일이다.

선자(김민하)는 그 살아남는다는 의미가 체화된 캐릭터다. 그는 일제강점기 같은 게 자신의 삶을 그렇게 뒤틀어놓을지 몰랐다. 한수(이민호) 같은 인물과의 인연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는 삶을 선택한다. 한수와 갖게 된 아이까지를 끌어안아준 이삭과 혼례를 올리고 일본 오사카행 배를 탄다. 선교를 위해 그곳으로 간 것이지만 이삭은 그곳에서 만난 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고는 현실에 눈을 뜬다. “두려움이 내 몸을 멋대로 주무르게 놔두면요, 나중엔 내 몸의 윤곽조차 낯설어질 거예요. 그걸 내 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자기 몸도 없는 게 사람이에요?”

그래서 선교와 더불어 핍박받는 한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줘 온 이삭은 끝내 연행되어 끌려간다. 그리고 ‘반동분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선자 역시 끌려가 취조를 받는다. 하지만 선자는 경찰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차게 말한다. “지가 아는 그 분은 그저 남편이고 아버지고 목사고 선한 분입니더.” 선자는 남편이 이렇게 끌려간 것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자는 남편과 함께 공산주의를 꿈꾸며 세상을 바꿔보려 했다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일갈한다. “그라믄 우리는 우짜라고예? 남정네들이 그짝 꿈만 좇고 있으믄 밥상에 묵을 거는 누가 올리고 한겨울에 얼라들 옷은 어데가 구해 입힙니꺼? 그분이나 그짝이나 우리들 생각은 한번이라고 하긴 한 겁니꺼?” 선자의 그 말에 답답해하던 그들이 그 일이 바로 선자와 아들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해도 선자는 그런 그들이 더 답답하다. “어데서 그딴 소릴 합니꺼? 그 손 좀 보이소. 살면서 하루도 일 안 해 본 손 아입니꺼? 그런 사람이 지금 내 심정을 알 리가 있습니꺼?”

나라를 빼앗긴 이들이 구국투쟁을 하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한다며 공산주의에 빠지건 선자는 그런 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살아남는 일이 우선이다. 당장 자신도 그렇고 아이들도 가족도 살아남아야 한다. 결국 이삭이 끌려가면서 그 형 역시 직업을 잃게 되자 선자는 김치를 담가 시장에 나간다. 냄새 때문에 모두가 옆에 오는 것도 꺼리는 당시 상황 속에서 선자는 일본어도 서툴고 창피하기도 하지만 외치기 시작한다. “김치 사세요 신선한 김치! 맛보고 가세요!”

<파친코>가 우리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대중들을 사로잡는 건 우리가 흔히 먼저 떠올리는 한일관계 과거사의 문제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이로 인해 한국이 일제강점기에 겪은 아픈 상처들과 그로인해 현재까지도 그 차별 속에서 버텨온 재일 한인의 삶이 제대로 알려질 계기가 된 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파친코>가 보다 보편적인 공감대를 갖게 된 이유는 그 역사가 망쳐놓은 세월 속에서 선자 같은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그 지점을 포착하고 있어서다.

선자는 그래서 <파친코>를 계속 보게 만들고 또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캐릭터다. 그래서 단호한 눈빛으로 입을 앙다물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특히 여성 캐릭터로서 이토록 낮고 차분하지만 당찬 목소리가 주는 매력을 가진 캐릭터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물론 이제는 그 주근깨조차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김민하라는 배우의 연기가 한 몫을 차지하지만, 그건 또한 선자라는 막강한 생명력을 표징하는 캐릭터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너지다.

“20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식민 지배 때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 중 약 80만 명은 일제에 의해 노동자로 끌려갔다. 대부분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약 60만 명은 일본에 남아 무국적자가 됐다. 이 이야기는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견뎌냈다.” 시즌1을 마무리하는 8부 엔딩 끝에 ‘파친코’는 그런 자막과 더불어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재일 한인 여성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이제는 90세가 훌쩍 넘은 할머니들은 웃으며 젊은 날을 술회했지만 그 얼굴 가득한 주름에는 그들이 겪었을 시대의 굴곡들이 묻어났다. 그 분들이 모두 선자였다. 이미 시즌2를 확정지은 ‘파친코’가 앞으로도 전해줄 선자의 못 다한 이야기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애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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