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 막내아들’과 ‘형사록’, 이성민의 연기는 더 깊고 짙어졌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올해 JTBC 드라마의 판도를 바꿔버린 건 단연 <재벌집 막내아들>이다. 그간 시청률과 화제성에서 고전하던 JTBC 드라마가 시청률 20%을 가볍게 넘기는 대박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건 그저 운이 좋아 생긴 결과는 아니다. 탄탄한 대본과 빈틈없는 연출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이 배우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극 중 진양철 회장을 연기하는 이성민이다.

물론 <재벌집 막내아들>은 진도준(송중기)이 주인공이고, 죽었다 회귀해 순양그룹 재벌가 막내손자로 다시 살게 되면서 이 재벌가의 계열사들을 하나하나 사들이는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송중기는 이 인물의 연기를 단단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주변인물들의 연기도 하나 같이 빠지는 게 거의 없다. 첫째 진영기 역할의 윤제문, 그의 아들 진성준 역할의 김남희나 둘째 진동기 역할의 조한철, 고명 딸 진화영 역할의 김신록 또 그의 남편 최장제 역할의 김도현도 빼놓을 수 없다. 모두가 진도준과 대립구도를 만들어내면서 드라마의 극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만든 일등공신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긴장감이 하나로 뭉쳐지는 곳에 이성민이 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생각을 하고 또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에 따라 극의 흐름이 요동을 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건, 이 드라마 속 재벌가의 구도가 저 왕조시대의 왕가 구도를 빼닮아서다. 왕에 의해 후계구도가 영향을 받는 것처럼, 순양그룹의 후계구도는 이 진양철이라는 현대판 왕좌의 주인이 쥐고 있다.

진도준이 전면에 등장하고 진양철이 한 발을 뒤로 뺀 상태에서 살짝 긴장감이 빠졌을 때, 다시 그 텐션을 끌어올린 건 두 사람이 탄 차가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교통사고가 벌어지는 장면이었다. 진양철이 금융지주회사를 세워 그걸 진도준에게 주려고 마음먹는 순간 터진 교통사고. 이 사고로 인해 진양철과 진도준은 한 배를 타게 되고, 누가 이 일을 사주했는가를 밝히려 한다. 그런데 그 순간에 또 다시 진양철 회장이 섬망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긴장감을 만든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사회에 참석해 건재함을 과시하는 진양철 회장의 모습은, 의기양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심각한 상태가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아슬아슬함이 더해졌다. 이성민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서 순간, 정신을 놓아버리고 아이처럼 멍해져버리는 모습을 오감으로써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박아 놓았다.

진양철이라는 캐릭터 하나에 대중들이 여러 대기업 총수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어떤 게 닮았다는 이야기를 쏟아내는 건, 이성민이 이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사전에 준비를 했는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투박한 안경에 상대를 씹어 먹을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을 더하고 누가 뭐래도 밀어붙이는 고집스런 면들을 앙다문 입만으로도 느껴지게 만든다. 경상도 사투리 특유의 강한 뉘앙스는 물론이고 제왕처럼 걷는 모습과 섬망 증세 속에서 여지없이 드러내는 연약하고 평범한 노인의 모습까지 이성민이 그려내는 진양철은 그만큼 입체적이다.

물론 이성민의 연기는 지금껏 여러 작품들 속에서 강렬한 잔상을 남겨왔던 게 사실이다. <골든타임>에서 응급실을 뛰어다니며 환자를 살려내는 의사 역할이 그랬고, <미생>에서 눈이 벌겋게 일하던 상사 역할이 그랬다. 하지만 올해 이성민의 연기는 더 짙어졌다. 특히 <형사록>에서 ‘늙은 형사’가 가진 만만찮은 경험치와 동시에 어딘가 느껴지는 처연함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연기해 이 작품에 깊은 아우라를 만들어낸 것 역시 이성민의 이런 짙어진 연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기자에게 나이는 양면적인 의미를 갖는다. 나이 들어갈수록 젊었던 시절의 면면들에서 멀어지지만 동시에 삶의 경험에서 묻어나는 연기의 나이테도 두터워진다. 이성민은 그 나이테가 갈수록 두터워지는 배우다. 연기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성민의 연기는 더 깊어지고 짙어졌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JTBC, 디즈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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