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극의 백미 ‘부부의 세계’, 기념비적인 작품인 이유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드라마 찬(贊)△.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기록적인 시청률을 남기고 종영했다. 그동안 불륜을 주제로 한 드라마는 많았지만, 이토록 총체적이고 농밀하게 그린 드라마는 없었다. 16부작 드라마가 아니라, 50부작 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여러 편의 불륜 드라마를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서사가 탄탄하고 인간군상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다. 이처럼 풍부한 텍스트일수록 보는 사람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부부의 세계’가 불륜 드라마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점이다.

무엇이 그리 대단한가. 일단은 미려한 만듦새를 꼽을 수 있다. 그리스 비극 같은 내적 완결성을 지니는 서사에, 결혼과 부부에 대한 교훈을 끌어내는 주제도 뛰어나다. 연기나 연출은 말할 것도 없고, 플롯과 편집도 대단히 탄탄하다. 가령 드라마는 거울상을 자주 활용한다. 지선우가 폰 사진을 보며 남편의 외도를 알아채는 장면과 여다경이 폰 사진을 보며 남편의 외도를 알아채는 장면은 정확한 대칭을 이룬다. 또한 지선우가 아들을 차에 태우고 달려 이태오의 이성을 잃게 하는 장면과 이태오가 아들을 태우고 사라져 지선우가 사색이 되어 찾는 장면도 대칭을 이룬다. 한편 지선우와 민현서가 남자에게 스토킹을 당하며 끝내 그에 대한 연민을 거두지 못하는 모습도 대칭적이다.

◆ 아쉬울 것 없는 여자들이 남자를 사랑해서 얻은 불행

‘부부의 세계’의 구도가 기존의 불륜 드라마들과 다른 점은 여자 주인공의 사회경제적 지위이다. 지선우는 전문직 여성이고, 여다경은 굉장한 재력가의 딸이다. 과거의 불륜 드라마들에서 여주인공은 남편을 잃으면 사회적 존립 기반까지 위협당하는 전업주부인 경우가 많았고, 상간녀도 남자의 경제력에 의존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혼을 결심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자 그동안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바쳐 만들어왔던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이다.

상간녀와의 관계는 ‘여자의 적은 여자’의 대결 구도가 되기 십상이다. 여기서 이혼은 애정의 문제라기보다 존재를 건 투쟁이 되곤 한다. 그런 구도하에서 한 단계 도약하는 작품들이 나오곤 했다. 원미경 주연의 드라마 ‘아줌마’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헌신으로 교수가 된 남편의 속물성과 허위의식을 벗겨내고 이혼에 성공한다. 배종옥 주연의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도 전업주부 여성이 시가의 도움을 받아 독립에 성공하고 두 여자로부터 버려진 남자의 쓸쓸한 몰락을 보여주었다.

‘부부의 세계’에서 여자는 남자의 사회경제적 능력에 의존하기는커녕 반대의 상태에 놓인다. 이태오는 지선우의 노동소득과 사회적 평판에 기대어 살았고, 이후 여다경 집안의 자본소득과 영향력에 의존해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 여기서 이태오는 여자에게 애정적 파트너로 존재할 뿐 ‘남근적 존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오는 ‘남근적 존재’인양 착각하다가 쫄딱 망한다.) 그렇다면 왜 두 여자는 이태오로 인해 고통받는가? 그들의 비틀린 욕망 때문이다.

지선우가 애초 이태오를 통해 얻은 것은 ‘유부녀’라는 지위이다. 미혼모나 독신녀가 아니라 ‘유부녀’로 아버지가 있는 아들을 키우고, 남편의 고향에서 지역 커뮤니티에 속해 사교 관계를 맺으며 부러움과 인정을 받는 삶. 지선우는 남편의 불륜으로 인해 그것이 모두 헛되며, 이태오가 아들의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이혼을 결심한다. 지선우가 믿고 추구했던 그 ‘정상성’이라는 것은 환상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드라마는 독신녀나 이혼녀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지선우는 ‘정상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이혼을 감행하고 아들과 아버지를 이간하여 ‘이태오를 도려내는 것’에 성공한다.

그런데 문제는 지선우가 이태오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이 오로지 ‘정상성’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은 ‘사랑’이다. 평온을 찾아가던 지선우 모자에게 재혼한 이태오가 복수하듯 들이닥친 것으로 2라운드가 시작되지만, 그 복잡한 과정에서 이태오를 향한 지선우의 미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선우는 ‘이혼을 한다고 칼로 도려내듯 정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쓸쓸히 말하지만, 그것은 이태오에 대한 애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지선우는 어쨌든 준수한 외모와 ‘자유로운 영혼’(푸하!)을 지닌 이태오를 사랑했으며, 이태오가 얼마나 한심한 인간이며 이태오와의 사랑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밑바닥까지 확인하고, 심지어 여다경에게 확인사살을 시켜준 후에도, 그가 죽으려는 순간 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을 버리지 못한다.

한편 여다경의 경우는 어떠한가. 무엇하나 부족하지 않은 여다경이 불행을 겪는 이유는 순전히 이태오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부남인 이태오와 2년간 사귀면서 ‘확신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의 로맨티시즘과 예술적 가능성을 사랑하여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고 결혼을 한 뒤, 승리자인양 의기양양해 했다. 현명하고 이해심 많은 아내이자 예쁜 딸의 엄마이자, 전처 자식의 쿨한 새엄마 노릇까지 자처하였지만, 그는 점점 불안에 빠져든다. 지선우처럼 이태오의 사랑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지선우가 과거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여다경에게 “우린 비슷하다”고 말하자, 여다경은 “흔한 스타일이잖아”라며 부인하다. 맞다. 흔한 스타일. 그러니까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데도 기껏 로맨틱한 남자에게 끌려 완벽한 결혼생활을 꿈꾸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단속하는 깐깐한 안주인 역할을 너무나도 열심히 해내는 여자. 그래서 남자에게 ‘숨 막혀서 바람을 피우게 되었다’는 핑계를 만들어주며, 불안감과 배신감에 치를 떠는 여자. ‘조강지처 콤플렉스’와 ‘부처 콤플렉스’에 빠진 여자. 가부장이 필요 없음에도 스스로 가부장제 속의 현모양처가 되지 못해 안달인 여자. 남자를 사랑하고 결혼을 욕망하는 ‘흔한 스타일’의 여자.

지선우가 담판을 짓기 위해 만난 여회장에게 건넨 말은 놀랍게도 “따님의 꿈은 무엇이었나요?”였다. 정말 궁금한 질문이다. 여다경의 욕망은 무엇이었기에, 기껏 이태오의 후처 노릇을 잘 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붓고도 안달복달하는가. 대체 그의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여회장은 지선우와 적대적 긴장 관계에 놓여있음에도, 지선우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에 진심으로 답한다. 딸이 미술관 다니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에겐 미술관을 차려줄 수도 있는 재력이 있음을 새삼 상기한 여회장은 마음을 움직인다. 여회장의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깔끔하게 이혼에 성공한 여다경이 로맨티시즘 따위에 콧방귀를 뀌는 모습은 상큼한 결말이다.

◆ 이별폭력을 당하면서도

한편 지선우는 죽으려던 이태오를 껴안는다. 이는 그의 욕망과 한계와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드라마는 초반부터 민현서를 지선우의 거울상으로 내세웠다. 민현서는 지선우에게 “자신의 불행을 깔고 사는 여자들”에 대해 말하며 동일시한다. 그런데 정말 논해야 될 문제는 “남자들이 깔고 사는 여자들”이 아닐까.

민현서와 지선우는 남자로 인해 고통받는 서로를 보고, 그들에게서 벗어나려는 서로를 돕는다. 하지만 그들은 이따금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민현서는 “그는 나 없이 안돼요.”라며 끌려다닌다. 데이트폭력을 가하는 박인규를 두려워하면서도 연민하는 것이다. 민현서는 법을 통해 한번 그에게서 벗어나지만, 계속 스토킹에 시달린다. 고산역에서 도망치는 민현서가 박인규에게 붙들렸을 때, 이별폭력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결국 박인규의 죽음으로서만 민현서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선우는 어떤가. 그도 법을 이용하여 이태오에게서 1차 벗어났다. 그러나 다시 나타난 이태오는 지선우를 스토킹 한다. 심지어 그 스토킹에 박인규를 고용함으로써, 이태오가 하는 짓과 박인규가 하는 짓이 하등 다를 바 없음이 명백해진다. 심지어 박인규는 이태오에게 “지선우를 미워하면서도 놓아줄 수 없는 마음, 그게 사랑”이라는 ‘한X남’식 사랑론을 설파한다.

지선우도 민현서만큼이나 이태오의 비열한 집착에 시달린다. 하지만 지선우는 이태오와 정사를 벌인다. 지선우는 자신에게도 이태오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아들에게 토로한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이태오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준다. 여다경에게 버림받아 폐인이 된 이태오가 유령처럼 자신의 곁을 맴돌다 아들을 납치하자, 지선우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봐’ 두려워서 따뜻하게 대해준다. 그의 행동은 이태오에게 어처구니없는 재결합을 꿈꾸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끔 한다.

실제로 이런 장면들은 이별폭력에서 자주 목격된다. 죽이겠다는 위협이나 죽겠다는 협박은 별 차이가 없다. 지선우는 이태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운 동시에 가엽기도 한 모순적인 감정에 빠진다. 남자는 여자를 증오하면서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연민한다. 이것이 데이트폭력 커플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순된 정서이다. 지선우는 마지막에 이태오를 끌어안음으로써 아들에게 환멸을 안긴다. 그리고 “부부의 세계에서는 일방적인 피해자도 없고, 가해자도 없다”는 지선우의 나레이션은 그의 해방과 행복을 응원하던 시청자들에게 숨막힘을 안겨주었다.

◆ ‘부모의 세계’를 자식이 보고 있다!

복잡하고 팽팽하게 전개되던 서사를 끝장낼 키는 엉뚱하게도 준영에게 쥐어져 있었다. 드라마의 마지막 시퀀스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준영에게로 시선의 중심을 옮긴다. 생뚱맞지는 않다. 준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의 주요한 목격자였으니까. 준영은 이태오와 여다경의 불륜은 일찌감치 목격했다. 지선우가 준영을 싣고 미친 듯이 질주할 때, 그는 이미 엄마의 광기를 보았다. 지선우는 준영에게서 아빠를 떼어내기 위해 자신이 폭행당한 모습을 준영에게 발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혼한 지선우와 이태오의 정사 장면이 하필이면 (아니 필연적으로!) 준영에게 목도되었다. 그리고 이태오가 차에 뛰어드는 모습과 그런 이태오를 껴안는 지선우를 마지막으로 보게 되었다.

민현서와 박인규의 애증이 박인규가 죽어서야 끝났듯이, 지선우와 이태오의 애증도 누군가 사라져야 끝난다. 그 사라짐이 이태오의 죽음이 아니라, 준영의 가출인 것은 나름 의미 있다. 준영을 단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가여운 객체가 아니라, 시선의 주체이자 비판과 결단의 주체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준영은 사라지기 전 올바른 비판의식을 보여주었다. 스토킹에 시달리는 지선우에게 “아빠에게 연락할 필요도 없고,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말한다. 뻔뻔하게도 재결합을 운운하는 이태오에게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나오느냐”고 일갈하였다. 그는 가출을 결행함으로써 두 사람의 끝도 한도 없는 애증의 라이브쇼를 절단해 낸다.

이는 곱씹을 의미가 충분하다. 첫째는 청소년을 새로운 주체로 세우는 진취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둘째는 불륜과 이혼 등 ‘부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은 자식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심오하게 일깨우는 교훈을 담고 있으며, 셋째는 청소년은 부모의 품을 떠나서도 사회의 보호를 받으며 살 수 있는 인권을 지닌다는 민주적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흔히 청소년의 가출은 ‘비행 청소년’, ‘사춘기의 반항과 방황’ 등의 키워드와 묶여 사고 된다. 가출청소년에 대한 최상의 대책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가출청소년 중 상당수는 자신의 집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어서 가출한 것이며,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문제해결이 아닌 경우가 많다. 탈가정 청소년이 쉼터 등에서 부모와 떨어져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할 경우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며 이들의 인권과 복지에 사회적 관심이 쏠려야 한다. ‘부부의 세계’에서 횡행하는 온갖 모순된 감정을 응축시켜 보여주던 드라마가 청소년의 주체성과 가출청소년 지원제도를 환기하는 뜻밖의 교훈을 만들어내다니, 과연 가정극의 백미이다.

황진미 칼럼니스트 chingmee@naver.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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