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불행이 다가올 때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엔터미디어=정덕현] 판타지는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현실의 어떤 결핍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tvN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는 그 추상적인 제목 속에 탁동경(박보영)이라는 인물의 결핍이 느껴진다. 그는 뇌종양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한창 청춘이지만 이제 곧 죽을 거라는 것.

그 선고는 자신이 죽는 것이지만 세계의 ‘멸망’처럼 다가온다. 이 드라마를 집필한 임메아리 작가는 탁동경이 마주한 이 참혹한 현실을 멸망(서인국)이라는 판타지적 존재가 어느 새벽 그가 사는 집 문을 열고 저벅저벅 들어오는 것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탁동경은 멸망과 계약을 한다. 고통을 사라지게 해주고 소원 하나를 이뤄주는 대가로 죽기 전 멸망을 외쳐달라는 게 그 조건이다. 단 계약을 어길 시 탁동경은 그 순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되는 조건 또한 달렸다.

멸망, 시한부, 죽음 같은 단어들이 가득한 이 드라마는 그러나 의외로 달달하고, 때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그려진다. 물론 순간순간 무거운 공기를 마주하는 멸망과 탁동경의 상황들이 제시되지만, 그것 역시 연애를 시작한 이들의 밀당처럼 표현된다. 그래서 탁동경은 시한부로 죽음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해맑은 모습을 자주 보인다.

알고 보면 탁동경은 멸망이 늘 가까이 있었다. 부모가 모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일도 그래서 어린 동생과 함께 살아남아야 했던 일들도 알고 보면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이유’인 멸망이라는 존재가 그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멸망 역시 그 사실을 알게 되고 탁동경에게 연민을 넘은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

탁동경과 멸망이라는 판타지적 존재와의 사랑을 담고 있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탁동경이라는 인물이 처한 절박한 상황이 만든 그의 판타지로도 읽혀진다. 늘 사랑하던 사람들이 먼저 사라졌고, 이제 자신도 사라질 처지 앞에 놓였다. 이러한 불행을 넘어 ‘멸망’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고 작가가 탁동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탁동경은 불행을 외면하지도 그렇다고 그 안에 빠져 허우적대지도 않는다. 대신 그 불행(멸망)마저 껴안고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만일 이렇게 불행이 가득한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어째서 나만 이러냐고 한탄했다면 그는 차라리 세상의 멸망을 외치는 저주를 했을 게다. 하지만 불행을 받아들이고, 그것조차 사랑하며 그래서 세상의 멸망을 원치 않게 된 탁동경의 선택은, 새삼 누구나 그 길이에 차이가 있을 뿐 다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과 그 앞에서의 선택을 생각하게 한다.

탁동경이 안타깝고 애처롭게 보이는 멸망은 이제 그를 데리고 이미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벚꽃이 핀 시간으로 함께 가고, 부모와 함께 놀이공원을 갔던 그 어린 시절로 찾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이동해 그 순간에 머물 수 있는 건 아주 짧다. 다시 곧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것. 하지만 찰나의 기억처럼 다녀온 그 행복했던 순간들을 마주한 후 탁동경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멸망은 자신이 존재해 탁동경이 불행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에 탁동경은 이렇게 답한다. “뭐. 넌 겨울이고 어둠이고 끝이고 그러니까? 야. 나 겨울 좋아해. 밤도 좋아하고 끝도 좋아. 달리 말하면 봄도 아침도 시작도 다 너 때문이지. 내 불행도 행복도 다 너란 얘기야.” 탁동경은 자신의 불행(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수긍함으로써 그것이 삶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걸 알게 된 인물이다. 멸망이 말하듯, 삶의 모든 생명들이 예쁜 건 사라질 존재들이어서라는 걸 이 인물은 말하고 있다. 죽음(멸망)을 마주한 그의 해맑은 미소가 먹먹하게 느껴지는 건 거기 이러한 인간의 실존이 담겨 있어서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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