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애도의 5단계를 멜로로 풀어내면 이런 풍경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이 드라마 문제작이다. tvN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는 먼저 그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16부작으로 이제 2회를 남기고 있는 이 드라마는 일단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 말하기가 어렵다. 제목과 서인국, 박보영 캐스팅이 주는 기대감으로 4%대(닐슨 코리아)로 시작한 드라마는 2%대로 떨어졌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건 멸망(서인국)이라는 판타지 인물을 등장시켜 뇌종양으로 100일 시한부 판정을 받은 탁동경(박보영)과 밀고 당기는 멜로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가 쉽게 이해되지 않아서다. 어찌 보면 멸망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세워놓고 벌어지는 멜로는 그래서 이야기 자체도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이들이 나누는 대사도 선문답처럼 다가온다. 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멜로’의 클리셰에 가까운 것들이지만, 그것이 멸망이라는 인물과 나누는 것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멸망>은 이 판타지를 통해 우리에게 무얼 이야기하려 한 걸까.

멸망이란 판타지 인물이 어떻게 탄생했고 또 사라지는가를 들여다보면, 그 인물은 사실상 탁동경이 만든 인물처럼 보인다. 그가 그 인물을 소환한 건 말 그대로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다. 당장에 벌어진 절망은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과 머릿속에 종양이 자라나 100일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선고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탁동경은 어려서부터 상실의 절망을 겪었던 인물이다. 교통사고로 부모가 한꺼번에 돌아가셨고 그래서 홀로 동생을 돌보며 버텨내야 했다. 멸망이란 인물은 갑자기 탁동경 앞에 나타난 게 아니라, 그의 심연에서 이미 고개를 들고 있었고 시한부 선고 같은 촉발점에 의해 수면 위로 올라온 거라는 것.

그래서 드라마는 탁동경이라는 인물이 ‘상실’ 혹은 ‘절망’ 앞에서 이를 어떻게 대응하고 익숙해지고 받아들이는가의 과정을 그린다. 그것은 <죽음과 임종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가 말하는 이른바 ‘애도의 5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죽음을 마주하게 됐을 때 보이는 반응으로, 거부,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멸망>은 이 관점으로 보면 탁동경이라는 인물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를 거부하고 분노하다가 어떤 타협을 시도하고 그러다 도무지 바뀔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우울해하다 결국은 수용하는 과정을 ‘멸망과의 멜로’로 그려낸 작품처럼 보인다.

절망적인 상황에 세상을 향해 ‘다 망해 버리라’며 저주와 분노를 퍼붓던 탁동경은 그래서 실제 나타난 멸망이라는 존재 앞에서 당황해한다. 분노의 감정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그 저주의 감정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결국 그는 그래서 멸망 앞에서 계약서를 쓰고 타협을 시도한다. 멸망을 받아들이는 일(일종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은 달콤한 감상과 더불어 우울이 반복되는 일이다. 그래서 도무지 바뀌지 않는 운명 앞에 심지어 기억을 지워버리려 하지만 멸망(운명)은 사라지지 않고 그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신에게 기억을 지워 달라 요청하고 그래서 기억이 리셋된 멸망과 탁동경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어딘가 자꾸 이끌리는 과정은 바로 이 타협과 우울의 반복을 담아내고,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멸망과 탁동경은 이를 수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상실’을 수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다시 살아간다. “인간은 다시 살아갈 수 있어. 인간이니까.”라고 멸망이 탁동경에 말한 것처럼.

이 문제작은 그래서 뇌종양처럼 깊은 상실의 아픔을 수용해가는 인간의 과정을 탁동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리고 있다. 멸망이라는 판타지 인물이 결혼을 하자고 하는 그 장면은 그래서 여타의 멜로드라마가 그리는 해피엔딩을 담고 있지만, 그 대상이 수용하면(사랑하면) 사라질 운명을 가진 멸망이라는 점은 이 해피엔딩을 새드엔딩과 중첩되게 만든다. 즉 그 장면은 탁동경이 멸망이라는 대상과 사랑이 이뤄지는 순간(해피엔딩)이면서 동시에 그를 떠나보내는 순간(새드엔딩)이기도 하다.

그 후로 아마도 탁동경은 이제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 그 상실의 아픔을 조금씩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알고 보면 ‘세상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이유’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나타난 멸망이라는 ‘절망적인 존재’는 탁동경 같은 벼랑 끝에 선 인물이 계속 버텨내게 해주는 힘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마도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그(멸망)가 있어 탁동경은 거부하다가 화를 내기도 하고 타협도 하면서 우울하지만 그 상황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 계약은 무효야. 네 슬픔은 네 아픔은 내가 다 가져갈게. 걱정 마. 내가 다 가져갈게. 난 너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야. 그러니까 울지 마. 행복하게 살아. 난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아까 성당에서의 소원. 네가 행복하게 해달라고 빌었어. 내가 예전에 말해준 거 기억하지? 비가 와도 너 혼자 우산이 없어도 아무 것도 아냐. 달려가면 금방 집이니까. 내가 사라지더라도 달려가. 돌아보지 말고 달려가. 그러면 금방...”

그런 말을 남기고 멸망은 사라진다. 마침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탁동경은 빗속에서 오열한다. 하지만 그 오열 끝에 그는 결국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멸망이 말한 것처럼.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가 무의식 속에서 빙봉이를 만나고 힘을 얻고 헤어지는 그 과정이 연상된다. 라일리가 어린 시절 상상 속에서 만들었던 빙봉이라는 존재가 탁동경이 끄집어낸 멸망이라는 존재와 겹쳐 보인다. 그렇게 우리는 죽을 것만 같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를 이겨내고 살아간다. 인간이니까.

물론 이건 하나의 상상력을 더한 해석일 뿐이다. 시청자들에게 이 드라마는 조금 이상하지만 때론 달달하고 때론 슬프지만 그저 평이한 판타지 멜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그리 잘못된 게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재미있게 그 안을 들여다보고픈 분들이라면 이런 상상력을 더한 해석으로 꽤 많은 생각할 거리들이 남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것이 <멸망>이 문제작이라 말하는 이유다.

눈길을 끄는 소재로 드라마 고정팬들을 잡아끌고 있는 멜로의 새 풍경에 대해 엔터미디어 채널 싸우나 정덕현 평론가가 분석해봤습니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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