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죽음이라는 불리한 게임을 사랑으로 상대하는 방법
삶의 유한성과 죽음의 불가피함을 위로하는 희한한 멜로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남지우·이승한·정석희 세 명의 TV평론가가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TV삼분지계]를 통해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묘하다. 막 방영 2주차를 보낸 tvN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는 감정보다는 머리를 더 많이 쓸 것을 요구하는 멜로드라마다. 로맨스 장르의 장인 박보영과 서인국이 만났지만, 인물 간의 즉각적인 화학작용보다는 복잡한 게임의 룰이 앞선다. 세상 따위 망해버리라는 시한부 환자 탁동경(박보영)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동경 앞에 등장한 남자의 정체는 ‘멸망’(서인국), 세상 모든 것의 죽음과 소멸을 관장하는 존재다.
3개월 동안 아프지 않게 해줄 테니 대신 3개월 뒤엔 소원했던 대로 세상을 절멸시킬 것이며, 마음을 바꿔 계약을 해지하려 든다면 그 대가로 네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멸망에게 동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난 너를 사랑해 보겠노라고. 마음이 내켜서 살아 숨쉬는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절멸과 자신의 죽음을 피해야 하겠기에 ‘멸망’이라는 개념 자체를 사랑해 보겠다는 도박이다. 드라마는 구석구석 ‘심쿵’ 요소를 심어 두었지만, <멸망>은 설레기보다는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묘한 멜로드라마다.

정석희 평론가는 이처럼 묘하고 복잡한 게임의 룰에도 작품을 포기할 수 없는 핵심적인 요소로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박보영의 힘과, 잘 구축된 캐릭터들의 매력을 꼽았다. 저마다의 개성으로 빚어진 인물들을 보는 재미만 따지면, 16부작이 아니라 시즌제 드라마로 꾸준히 봐도 좋을 것이라는 호평이다. 남지우 평론가는 <멸망>을 보며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나 <곡성>(2016), <킬링 디어>(2017)처럼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이나 ‘불가항력의 재난’이라는 개념을 의인화한 캐릭터를 선보인 영화들을 떠올렸다. <멸망>이 초월자가 인간에게 건넨 불리한 게임에 반격할 방편으로 ‘사랑’의 논리를 꺼낸 것이 흥미롭다는 반응이다.
한편 이승한 평론가는 <멸망>에서 동경과 멸망이 서로를 연민하고 이해하는 과정 자체가, 삶의 모순과 죽음의 불가피함을 긍정하고 끌어안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평한다. 동경이 멸망을 사랑하려는 시도 자체가,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긍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의 다른 표현이라는 분석이다.

◆ 마음을 붙드는 박보영의 힘
어디 해설집 없을까? 기획의도와 등장인물 소개를 꼼꼼히 살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관련 기사마다 등장하는 한 문장,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이유가 되는 존재 ‘멸망’과 사라지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건 계약을 한 인간 ‘동경’의 아슬아슬한 목숨담보 판타지 로맨스. 도대체 뭔 소리래. 요 근래 엉킨 실타래 같은 장르물 섭렵 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이젠 판타지까지 꼬고 또 꼬고, 혼돈의 도가닐세. 소녀신(정지소)이 필경 전지전능을 부여했을 텐데 멸망(서인국)은 왜 차를 타고 다녀? PPL 때문에? 신들의 직장이 종합병원이야? 가끔 담배를 입에 무는 건 무슨 의미야? 감정이 없다며 수시로 치명적인 척은 왜 하는데?

멸망이라는 캐릭터 하나를 두고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 동경(박보영)의 메모로 그나마 알게 된 게 있다. 둘이 맺은 계약을 깨면 동경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동경이 멸망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멸망이 자신을 죽일 수는 없으니……. 아, 이것도 어렵다.
어려운데 포기가 아니 된다. 다음 회가 기다려진다. 이게 다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박보영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도 매력 있다. 소녀신만 제외하고. 여느 드라마라면 주인공들과 삼각관계였을 편집팀장 차주익(이수혁), 웹소설 작가 나지나(신도현), 동경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동생 탁선경(다원), 그리고 수영선수 출신 카페사장 이현규(강태오). 동경의 동료인 편집팀 직원들도 흥미롭고 동경이 속아서 만난 유부남(김지석)의 아내(김백리)도 다시 보고 싶다. 16부작이라고? 시즌제 혹은 시트콤이어도 좋겠는데?
정석희 TV 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불리한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
어떤 영화들엔 자연재해처럼 찾아오는 악이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의 안톤 쉬거, 배우 황정민이 연기한 <곡성>(2016)의 무당, <킬링 디어>(2017)의 마틴 같은 전설적인 캐릭터들이 그렇다. 주인공의 세상에 불쑥 나타나 이들이 돌발적으로 행하는 악은 세상의 논리론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 주인공과 그에 이입한 관객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진짜 나한테 왜 이래ㅠㅠ’를 반복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악행은 ‘사건’이 아니라 불가항력의 ‘재해’가 되고, 그 악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어떤 ‘개념’처럼 느껴지게 된다. 사람인 배우가 그것을 연기하더라도 말이다.
<멸망>은 이러한 ‘개념의 의인화’ 기법으로 탄생한 tvN의 오리지널 시리즈다. ‘멸망’이라는 개념이 배우 서인국의 몸을 빌려 의인화됐고, 그것이 주인공 탁동경(박보영)의 더럽게 운수 없는 날에 찾아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동경의 불행을 게임처럼 여기며 거래를 제안해오는 멸망의 태도는, 앞서 언급한 세 영화에서 인간으로 분한 ‘악’의 태도와도 비슷하다. 안톤 쉬거의 동전 던지기, 마틴의 러시안 룰렛이 그랬다. 게임의 기본값부터가 주인공에게 불리하니, 어찌 됐든 주인공은 불행을 겪게 된다는 것이 위 영화들에선 예상된 수순이었다.

‘동경은 세상이 멸망하길 빌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 <멸망>의 주인공 역시 초월자가 벌인,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불리한 게임에 초대된다. 하지만 3화에 이르러 그녀는 절망하기보다는 반격에 나선다. 자신이 멸망을 사랑함으로서, 다른 소중한 사람이 아닌 너(멸망)를 죽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바로 이 엔딩의 순간, 두 남녀 주인공의 긴장과 대결 구도가 형성되고, 로맨스 장르에서는 뻔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논리학의 영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멸망>은 자연재해처럼 찾아온 설명할 수 없는 불행에, 사랑이라는 논리로 맞서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남지우 칼럼니스트 Instagram @jmbar_jwjw

◆ 설렘과 들뜸에 큰 관심이 없는 멜로
<멸망>은 좀처럼 설레거나 들뜨지 않는 멜로 드라마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멸망>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작품이다. 박보영과 서인국 두 주연의 연기는 출중하고, 동경(박보영)과 멸망(서인국)이 한 집에서 티격태격하며 서로에게 가까워졌다가 마음을 다쳤다가 하는 순간의 묘사들은 사랑스러우며, 차주익 팀장(이수혁) 등의 조연들이나 동경의 진상 구남친 조대한(김지석) 같은 단역조차도 저마다의 서사를 지니고 보는 이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단지, 설레거나 들뜨거나 크게 우습지 않을 뿐이다. <멸망>의 모든 자원은 삶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존재하지, 설렘과 들뜸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다.
동경과 멸망이 서로를 연민하고 가까워지는 가장 멜로적인 순간조차, <멸망>은 끊임없이 생명의 유한성을 상기시킨다. 동경은 주변 모든 것의 생명이 사그라지는 것을 견뎌야 하는 멸망의 고독한 숙명을 연민하는데, 이는 다세포 생물이라면 피할 수 없는 쇠락과 죽음, 소멸 자체에 대한 서글픔에 가깝다. 인간의 경박함을 경멸하면서도 내심 동경을 가엾이 여기는 멸망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 따위 다 망해 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동생 선경(다원)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동경의 욕망은 모순투성이이며, 멸망은 그 모든 모순된 욕망이 참인 피로한 동경의 삶을 연민한다. 그래서 동경과 멸망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설레는 판타지 멜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삶의 숙명적인 피로와 소멸의 불가피함을 슬퍼하다가 천천히 납득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건 멜로가 아닌 멜로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동경은 살기 위해 멸망을 사랑하려는 도박을 걸지만, 이는 오히려 제 생이 끝날 것이라는 통보를 남들보다 다소 일찍 받은 동경이 그 죽음을 납득하는 과정에 가깝다. 피할 수 없는 소멸의 숙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으므로. 동경의 도박은 아주 높은 확률로 죽음을 피하는 방식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삶의 일부로 긍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방식으로 이길 공산이 크다.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을, 아주 희한한 방식으로 위로하려는 드라마가 등장했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영상=tvN. 그래픽=이승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