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지상파... 사극이라는 열두 척의 배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지금의 지상파 드라마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KBS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도 등장했던 이순신의 명언이 떠오른다. 넷플릭스부터 디즈니플러스는 물론이고 티빙, 웨이브, 왓차 같은 OTT들이 쏟아져 나오고, 시청자들의 대부분이 OTT오리지널 시리즈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지상파 드라마들은 쉽지 않은 상황에 놓인 게 사실이다. SBS는 일찍이 상업방송으로 이런 변화에 빨리 대처했지만 MBC와 KBS는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지난 몇 년 간 이렇다 할 화제작을 내놓지 못한 건 투자여건도 그렇지만 좋은 작품들이 발길을 돌리게 되면서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SBS ‘홍천기’가 선전하며 종영한 후, KBS 월화드라마 ‘연모’와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보이는 좋은 반응을 보면 지상파에도 ‘열두 척’의 배가 존재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그건 다름 아닌 사극이다. 오래도록 스테디셀러로 존재했던 사극은 지상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시켜온 장르다. 그래서일까. 사극을 중심으로 지상파 드라마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연모’는 국내는 물론이고 넷플릭스 서비스를 통해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옷소매 붉은 끝동’ 역시 그간 고개를 숙였던 MBC 드라마의 부활이라고 불릴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 KBS는 12월 초 ‘태종 이방원’으로 주말 대하사극을 다시 시작한다. 만일 ‘태종 이방원’까지 성공을 거둔다면 명실공히 사극이 지상파를 부활시키는데 열두 척의 배가 됐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 작품들에는 그간 해당 방송사들이 해왔던 사극의 전사가 어른거린다. ‘연모’는 남장여자 콘셉트의 사극으로 ‘성균관 스캔들’과 ‘구르미 그린 달빛’의 변주처럼 보이고, ‘옷소매 붉은 끝동’은 이산과 의빈 성씨의 사랑을 그린 사극은 과거 이병훈 감독의 ‘이산’이 어른거린다. 이제 방영예정인 ‘태종 이방원’도 마찬가지다. KBS 대하사극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일컬어지는 ‘용의 눈물’이 바로 이방원의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이렇게 된 건 이들 사극이 갖는 소재들이 가장 성공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모’가 가져온 남장여자 콘셉트의 사극은 시대와 상관없이 조선사회를 배경으로 남녀 사이를 넘나드는 그 아슬아슬한 금기의 해체가 강력한 극성을 만들어내는 소재이며, ‘옷소매 붉은 끝동’이 가져온 영정조 시대 이야기나 ‘태종 이방원’의 조선 건국 시기 이야기는 그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드라마틱해 여러 차례 사극으로 만들어진 소재다.

하지만 이런 소재의 선택에는 그 스토리가 가진 강력한 극성만의 이유는 아닐 듯싶다. 그만큼 확실한 성공이 보장된(이미 성공사례가 분명한) 소재를 선택하고 있어서다. 지상파의 위기감은 낯선 도전보다는 이미 자사가 시도해 성공을 거뒀던 소재를 시도하게 된 중요한 이유일 듯싶다. 실제로 이런 성공사례들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보다 재미요소들을 강화해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자료들을 갖고 있는 셈이다.

과연 지상파는 사극이라는 열두 척의 배로 이 치열해진 전장에서 다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까. 분명 지금 방영되거나 준비되고 있는 사극들은 이미 성공했거나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성공이 지상파의 옛 위상을 복원하려면 그 후의 행보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 좋은 흐름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준비들이 과연 지금 진행되고 있을까. 내년 상반기 지상파 드라마들의 결산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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