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차승원·김수현의 연기로 채워진 비현실성의 공백

[엔터미디어=정덕현] “피고에게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피고가 피해자 홍국화양을 죽였습니까?”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드라마 <어느 날>에서 판사는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현수(김수현)에게 그렇게 묻는다. 사실을 인정하면 과실치사로 10년 형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피해자 홍국화(황세온)에게서 약물중독 증거가 나왔고, 변호를 맡은 박미경(서재희) 변호사가 그걸 검사인 안태희(김신록)에게 내밀며 ‘형량 거래’를 한 결과였다.

살인을 했다 자백하면 10년 형을 언도받고, 모범수로 지내면 3년 정도 감형되어 서른 즈음에 사회에 복귀할 수도 있다고 박미경 변호사는 현수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런 현수에게 신중한(차승원) 변호사는 그게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하면서도 그 인정으로 인해 찍힌 살인자, 범죄자라는 낙인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라 말했다. 자신의 발에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었던 아토피처럼.

저지르지 않은 살인을 부인하면 종신형이나 사형을 구형받을 수 있고, 그 거짓으로 살인을 인정하고 자백하면 10년 형을 받을 수 있다는 상황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사법 체계가 갖고 있는 허점들을 이 상황은 고스란히 드러낸다. 하지만 현수의 선택은 현실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는 홍국화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진실. 그는 결국 판사의 질문에 부인했고, 그 말에 박미경 변호사도 또 안태희 검사도 모두 경악했다.

<어느 날>이 담으려는 이야기는 이처럼 명백하다. 어느 날 밤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여자와 술과 분위기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고 난 후, 아침에 깨어보니 잔인하게 칼로 난자되어 죽어 있는 여자를 발견한 현수. 그는 충격에 증거를 숨기려 하고 도망치려 하다 결국은 긴급 체포됐다. 그는 홍국화를 죽이지 않았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나 증인은 전무하고 정반대로 그가 살인범이라는 증거와 증인들은 넘쳐나는 현실을 마주한다.

중요한 건 그 누구도 현수의 진실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처음 현수에게 손을 내민 신중한 변호사는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서로가 내놓은 스토리 중 어느 것이 더 믿을만하고 매력적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검사는 검사의 입장에서 현수가 잔혹한 살인자라는 스토리를 내놓고, 변호사는 이에 대항해 그가 무고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걸 강조하지만 때론 ‘진실’ 자체가 아니라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선택들이 사법 안에서는 오고간다.

안태희 검사가 현수에게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제안한 건 진실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만일 현수가 거부하면 유죄심증으로 공판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만에 하나 결과가 진실로 나와도 어차피 ‘거짓말 탐지기’ 검사는 증거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검가결과 거짓으로 나오면 검사 측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안태희는 천식이 있지만 검사 전에는 흡입기를 사용할 수 없는 현수를 더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일부러 검사 테이블 위에 흡입기를 놔두는 수법까지 사용한다.

변호를 맡은 박미경 변호사도 현수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유리한 상황으로 변호를 마무리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신중한이 찾아낸 홍국화의 약물증독 증거물을 이용해 안태희 검사와 ‘형량 거래’를 한다. ‘형량 거래’란 그 자체가 현수가 살인자라는 전제를 두고 벌이는 일이 된다. 그 역시 이 법정 싸움에서 자신을 위한 어떤 결과를 원하는 것이지 현수가 누명을 벗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 아니다. <어느 날>은 바로 이 검사와 변호사로 대변되는 사법 체계가 오히려 당사자들(피해자, 피의자)을 소외시키고 있는 현실을 꼬집는다.

이미 2007년에 방영됐던 BBC 영국드라마 <크리미널 저스티스>의 리메이크작인 <어느 날>은 리얼리티에 있어서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사법 체계가 영국과 우리의 것이 완전히 같다고 보기 어렵고, 나아가 여기 등장하는 교도소 같은 풍경들은 국내의 교도소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장르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사법 체계’의 문제 같은 현실적인 메시지가 힘을 발휘하려면 우리네 사법 체계의 현실성을 좀 더 리얼하게 찾아내 이를 작품에 녹여내는 과정이 더욱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어느 날>은 현실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법정물이라는 ‘장르의 맛’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현실성 부족의 공백을 채워주는 건 장르물의 색깔을 부여하는 연출과 무엇보다 연기자들의 호연이다. 김수현은 억울함 심경을 너무나 리얼하게 전달해주는 연기를 통해 현수의 현실을 실감나게 몰입하게 만들고, 차승원은 신중한이라는 3류로 치부되는 변호사가 가진 냉소적인 시선을 추레하지만 어딘가 남다른 공력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낸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조합만으로 억울한 현수를 3류 변호사 신중한이 그 진실을 풀어내주길 시청자들이 기대하게 만든다. 현실성의 공백을 채워주고 장르물의 색깔을 분명히 만들어주는 연기자들에 의해 몰입되는 <어느 날>. 과연 신중한은 시청자들의 기대대로 현수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쿠팡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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