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보니 진짜 뭐라도 남긴, ‘뭐라도 남기리’

[엔터미디어=정덕현] 김남길과 이상윤이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바깥에서 새로운 길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김남길과 이상윤은 도시에서 살아가다 길을 잃은 이들의 질문을 대신 묻는다. 정답이 있는 게 아니지만, 똑같은 길 바깥의 또 다른 길 위에 서 있는 그들은 그 삶 자체로 답을 해준다. 이것이 MBC 4부작 다큐멘터리 <뭐라도 남기리>가 담아낸 세계다.

물길로 막힌 강원도 비수구미 마을에 편지와 물건을 배달해주는 일을 21년째 하고 있는 김상준 집배원은 어려서 고생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 아버지는 젊었을 때 일을 잘 안하셨어. 그러니 우리가 일을 해야지 어릴 때부터. 내가 열 살 때부터 지게질을 배웠어요. 큰 고모부가 강 건너에 같이 살았는데 지게를 하나 딱 걸어주는 거야. 내 키에 맞게 걸어주는데 그걸 걸어 지고서 나를 따라오라는 거야. 내가 지게질을 버틴 놈이라니까.”

그에게 19살 김하예린님의 질문을 김남길이 대신 던져본다. “어른이 되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하나요?” 김상준 집배원은 “내가 할 얘기가 뭐 있겠냐”며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한 번은 고생을 해봐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어려서 호강하며 큰 사람은 커서도 호강을 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는 지 모르거든.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삶을 사는 거고 우리는 일을 하라고 타고 났으니까..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누구한테 피해 안주고 내가 맡은 거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

그가 하는 최선을 다하자는 말은 대단한 미사여구가 아니어도 힘이 있다. 그건 단지 말이 아니라 21년 간 이 물길을 가르며 고립된 마을을 오갔던 그 마음이 담겨 있어서다. 아니 열 살 때부터 지게를 지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버텨온 그 마음이 있어서다. 어른의 마음을 묻는 질문자에게 그래서 다른 이가 아닌 김상준 집배원이 툭 건네준 이 말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강원도 오지를 다니며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해오고 있는 왕진의사 양창모에게 27살 권지수님에게 이상윤이 대신 “꿈이 없는 게 고민”이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한참을 고민하던 양창모씨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꿈이 없는 삶을 30대 후반까지 살았어요. 제가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지금 4년째지만 4년 전에 길을 잃었기 때문에 이 길을 찾은 거거든요. 길을 발견하려면 길을 잃는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근데 그 길을 잃는 게 용기가 좀 필요하더라구요. 우리가 뭔가를 잡으려면 기존에 잡고 있던 걸 놔야지 잡을 수 있잖아요. 이 분이 꿈이 없다고 하시는데 그게 과정인 거잖아요. 괜찮은 거 같아요.”

지리산에서 만난 등반가 박정헌씨는 무슨 일인지 양 손가락이 모두 잘려져 뭉툭해져 있었다. 히말라야 촐라체에서 후배 최강식과 함께 북벽 등정에 성공했지만 내려오다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를 연결된 로프로 갈비뼈가 부러진 채 5일 간 사투를 벌여 결국 살아남게 됐지만 심한 동상으로 8개의 손가락을 절단해야만 했던 거였다. 손에 남은 흉터를 보이기 싫어 2년 간 반팔을 입지 않았다는 그는 산을 다시 오르게 되는 데는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등반을 할 수는 없었지만 패러글라이딩으로 히말라야 동서산맥을 횡단하고 히말라야에서 인도까지 6600킬로를 스키, 카약, 자전거, 트레킹으로 횡단하는 등 다른 방법으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24세 김보은 님의 질문을 던졌다. 연거푸 취업에 실패했다는 그는 “스물네 살에 진로를 바꾸는 건 늦은 걸까요?”라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시간은 그 2년이라는 아픈 시간입니다. 그 시간 때문에 다시 설 수 있었고 그래서 고통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좌절이라는 건 그냥 내가 받아들이고 또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회복도 빨라요.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는 너무나 아름답잖아요. 실패해도 아름답고. 그래서 이 친구한테 하고 싶은 말은 더 실패해보라는 거 같아요.” 그는 산에서 추락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해왔지만 그 일을 겪은 후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추락 또한 인생의 한 과정이라고.

<뭐라도 남기리>는 김남길 배우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이지만, 그 형식 자체가 힘을 뺀 느낌을 주는 다큐멘터리다. 김남길과 이상윤이 함께 바이크를 타고 달리고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 속에서 ‘뭐라도 남길’ 만한 것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고 가는 것. 그런데 신기하게도 진짜 이 다큐멘터리는 꽉꽉 채워 넣은 기획의 다큐멘터리보다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비워놓은 여백이 오히려 만들어내는 잔향이랄까. 뭐든 가득 채워놓거나 자극적인 것들에 늘 노출되어 있는 우리에게 ‘뭐라도’라는 말이 주는 여유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뭐라도 남기리>는 4부작으로 끝을 맺었다. 요즘은 드라마나 예능만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도 독하고 자극적인 것들이 적지 않다. 그 속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저 비수구미 마을의 집배원 아저씨나 강원도 오지를 찾아가는 왕진의사처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런 다큐멘터리가 4부작으로만 끝을 맺는 건 더욱 아쉽다. 적어도 모두가 달릴 때 걷는 속도로 가는 또 다른 길도 있다는 걸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하나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시즌제라도 다시 돌아와 뭐라도 남겨주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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