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대행사’·‘사랑의 이해’, 봉준호의 ‘기생충’이 떠오르는 건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우리 사회에서 태생적으로 그 미래를 결정하는 선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걸까. 최근 등장한 드라마들 속 여주인공을 보면 저마다 그들 앞에 그어져 있는 선이 보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의 문동은(송혜교), JTBC 토일드라마 <대행사>의 고아인(이보영) 그리고 JTBC 수목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안수영(문가영)이 그렇다.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학교폭력의 피해자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박연진(임지연), 전재준(박성훈), 이사라(김히어라)와 그들에 기생하며 살아온 최혜정(차주영), 손명오(김건우)가 바로 그 가해자들이다. 문동은과 박연진 일당 사이에 존재하는 선은 분명해, 온 몸이 고데기에 지져지는 고문에 가까운 학교폭력을 당했던 문동은은 피해자지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고, 반대로 가해자들은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고 멀쩡히 잘 살아간다.

학교폭력의 이면에 수저계급으로 나뉘는 선이 존재하고,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선 바깥에 있는 이들을 마음대로 괴롭힌다. 문동은은 이제 그 선을 넘어 자기가 당한대로 저들에게 처절한 고통을 안기려 한다.

<대행사>의 고아인은 부모도 없는 지방대 출신 흙수저 여성 커리어우먼이다. 광고대행사에서 남들보다 더 처절하게 노력해 오로지 실력만으로 유일한 여성 임원이 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러한 파격 인사는 재벌가 오너가와 남성들로 구성된 임원진들이 막내 딸 강한나(손나은)를 낙하산으로 앉히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고아인 앞에는 넘지 못하는 선이 놓여 있다. 남성들만 승진해 구성된 임원진, 스펙과 학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줄, 회사 경험이 전무하지만 오너가 딸이라는 이유로 떡 하니 상무 자리에 앉는 금수저라는 선이 그것이다. 선 바깥에 서서 ‘1년 간의 허수아비’ 노릇을 강요받는 고아인은 이제 저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사랑의 이해>의 안수영은 고졸 출신으로 일찍이 은행에 들어와 예금창구에서 일해 왔지만 늦게 들어온 하상수(유연석)보다 직급이 낮다. 안수영이 4년차 주임이지만, 하상수는 3년차 계장이다. 스펙으로 또 가진 것으로 구분되는 선이 이 은행에는 존재한다. 그건 직원들에게도 그렇지만, 그곳을 찾는 VVIP 손님부터 일반 손님까지에도 그어져 있는 선들이다.

그래서 하상수와 안수영은 처음 호감을 갖기 시작하지만, 이렇게 그어져 있는 선들 때문에 그 관계가 엇갈린다. 하상수는 대학시절부터 그를 따랐던 박미경(금새록)과 사귀게 되고, 안수영은 은행의 경비를 맞고 있는 정종현(정가람)과 관계를 맺는다. 어찌 보면 ‘끼리끼리’ 이어진 관계처럼 보이지만, 이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선이 그어져 있어 그 관계도 여의치 않다. 하상수는 자신보다 훨씬 잘 사는 재력가의 딸인 박미경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안수영은 갈수록 초라해져가는 정종현의 모습 앞에서 답답해진다. 사랑에도 드리워진 무수한 보이지 않는 선들 때문에 관계가 쉽지 않은 우리네 현실을 이 드라마는 예민하게 포착해낸다.

이 선은 바로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에서 지상, 반지하, 지하라는 주거 공간을 통해 그려냈던 바로 그 ‘계급의 선’이다. 그 선이 이제는 학교폭력과 연관된 복수극에도, 또 여성서사를 담은 오피스물에도 그리고 심지어 멜로드라마에도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작품들 속 주인공들은 그 선을 넘어 복수하거나, 생존하거나, 사랑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 선은 어디서부터 만들어진 걸까. 세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여주인공들의 부모가 닮아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문동은의 엄마는 그가 당한 학교폭력을 돈을 받는 조건으로 무시했고 심지어 딸을 버려두고 도망쳤다. 고아인의 엄마는 어려서 그를 버렸다. 그래서 고아인은 아예 부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안수영의 부모 역시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 빈자리를 채웠던 동생은 사망했다.

결국 이들이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선은 가난하고 그래서 무심했던 부모들로부터 물려받게 된 것들이다. 가진 것 없는 부모를 만나 유산처럼 물려받은 선 바깥에 놓인 이들 주인공들의 고군분투를 보면, 태생의 조건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현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모습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콘텐츠들은 그래서 이 기형적인 사회를 고치키는커녕 즐기고 있는 힘 있는 양반들 대신 지금 현재 이렇게 그어진 선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넷플릭스, JTBC, 영화 ‘기생충’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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