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의 동화 뒤집기와 서예지의 여성 캐릭터 뒤집기

[엔터미디어=정덕현] “너 그냥 나한테 폭죽 같은 거였어. 잠깐의 이벤트. 충분히 즐겼으니까 이제 그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주면 돼.” 아주 잠깐 동안의 달콤한 일탈을 꿈꿨지만 자신은 벗어날 수 없는 형 상태(오정세)가 있다는 걸 아프게도 깨달은 강태(김수현)는 고문영(서예지)에게 꺼져 달라며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문영은 알고 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그 역시 꺼져라고 말하면서 강태를 붙들고 가지 말라고 속으로 외쳤던 적이 있지 않던가.

tvN 토일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강태와 문영은 서로가 가진 상처 때문에 다가가기보다는 서로를 밀어낸다. 처음에는 문영이 강태를 밀어냈다. 마녀 같은 엄마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모두 죽여 버리겠다 엄포를 놓자 문영은 강태에게 꺼지라고 말했고, 이제 문영이 강태를 향해 마음을 드러내자 이제 강태는 형 상태만이 자신이 돌봐야할 존재라며 문영에게 꺼지라말한다.

대부분의 멜로드라마에서 이런 남자 주인공 앞에서 여자 주인공은 눈물을 흘리는 게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고문영이라는 여자 주인공은 다르다. 그는 큰 상처를 입고 눈물을 쏟아내지만 그러면서도 돌아선 강태의 뒤에 대고 저주에 가까운 소리를 쏟아낸다. “난 폭죽 아니고 폭탄이야! 터지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싹 다 죽인다고!”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고문영이라는 여성 캐릭터는 문제적이다. 지금껏 무수히 많은 멜로 드라마에서 봐왔던 그런 캐릭터의 정반대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안하무인이고 남성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때론 성추행처럼 보일 수도 있는 행동까지 한다. 물론 그건 이 인물이 어린 시절 겪은 학대 때문에 평범하게 살 수 없게 됐기 때문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마치 그간 남성 캐릭터들이 해왔던 많은 경계를 넘는 행동들을 미러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문영의 경계를 넘는 행동들에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어째서 그간 남성 캐릭터들이 사랑으로 포장되어 경계를 넘는 행동들에는 다소 둔감했을까.

문영은 그 많은 멜로드라마가 그려낸 동화 속 여주인공과는 정반대다. 그 흔한 신데렐라도 아니고 백설공주는 더더욱 아니며 미녀와 야수의 미녀도 아니고 라푼젤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동화 속 여주인공의 캐릭터에 반대하는 마녀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는 이 드라마가 매회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를 가져와 뒤집어 놓는 그 이야기와 어우러진다.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고문영이라는 문제적 마녀 캐릭터를 더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건 이러한 동화 뒤집기와 그 캐릭터가 일관된 메시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를 고문영은 미녀 앞에서 야수의 본성조차 누그러뜨리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을 억압하는 동화라고 말한다. 그래서 폭력을 당한 문영 때문에 앞뒤 보지 않고 주먹을 날린 강태가 끄집어낸 야수성을 문영은 칭찬한다.

이런 동화 뒤집기나 딴지걸기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양치기 소년>에서도 똑같이 등장한다. 속에 깊숙이 두고 있지만 꺼내놓지 않은 진심이 존재한다는 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통해 담아내고,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외로워서라는 색다른 시각을 더해 넣는다.

어찌 보면 이건 문영이라는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아온 동화작가 캐릭터여서 가능한 것들이다. 그런데 왜 하필 동화 뒤집기일까. 그건 아마도 동화가 선악을 나누고 선에는 행복을 악에는 처절한 응징을 가하는 그 이야기 구조를 통해 이를 읽는 대중들에게 부지불식간에 미쳐온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게다. 지금은 우리가 신데렐라 이야기에 식상해하고 불편함마저 느끼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이야기의 판타지에 별 의심 없이 빠져들지 않았던가.

<오즈의 마법사>를 뒤집어 초록마녀를 주인공으로 세운 <위키드> 같은 작품이나, 그 흔한 동화적 상상력을 뒤집어 잔혹동화로 만들어낸 팀 버튼의 작품들이 매력적인 건 별 의심 없이 봤던 이야기들이 소외시키고 억압시키는 것들을 이들이 풀어내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담고 있는 동화 뒤집기와 문영이라는 인물의 여성 캐릭터 뒤집기가 어째서 통쾌함을 안겨주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예지라는 배우가 제 옷을 입은 양 제대로 그려낸 문제적 캐릭터 고문영에 대한 열광은 바로 이런 지점 때문에 생겨난다. 꽃보다는 불꽃, 폭죽보다는 폭탄.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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