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의 특별했던 작품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배우 윤여정의 영화 이력은 다시 한 번 각광받는 중이다. 실제로 데뷔작 <화녀>부터 <바람난 가족> 이후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독특하고 의미 있고, 센스 있다.

하지만 브라운관 속 그녀는 영화만이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에게 친숙한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특히 윤여정은 1990년대 후반부터 신세대나 이후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사랑받아온 면이 있다. 친숙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 윤여정만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윤여정은 작가 김수현의 페르소나로 불려왔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서 윤여정은 은근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KBS <목욕탕집 남자들>에서는 시를 읊는 중년여인으로 등장했다. SBS <작별>에서는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남편과 헤어지는 아내의 삶을 현실감 있게 연기해 대중들의 공감을 사며 뒤늦게 시청률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작가 김수현의 세계, 혹은 다른 드라마에서도 주로 중산층의 중년 여성 울타리 안에 있었다.

그녀의 드라마 커리어가 특별해진 것은 90년대 후반부터였다. 젊은 작가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그녀만의 까끌까끌한 특유의 연기가 브라운관 속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신호탄이 1997년 방영한 노희경 작가의 <내가 사는 이유>였다. 90년대 후반에 70년대 마포 서울 서민의 삶을 조명한 이 드라마는 고두심, 김영옥, 나문희, 장용, 고 김무생을 비롯한 중견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 작품이었다.

윤여정은 이 드라마에서 술집 미인계의 마담 손언니로 등장했다. 담배를 연신 피워대는 깡마른 손언니에게 콧소리나 화려한 화장은 없었다. <내가 사는 이유>의 손언니는 까칠한 톤으로 달관한 사람 특유의 지혜를 읊조린다. 그것도 척하지 않는, 그냥 투덜대는 말투 안에 담아내는 인생에 대한 지혜를 녹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드라이한 연기는 70년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70년대에 태어났던 당시의 젊은 세대에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쿨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후 윤여정은 노희경 작가와 호흡을 맞추며 MBC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KBS <거짓말>을 통해 김혜자, 고두심과는 다른 엄마의 초상을 보여준다. 김혜자와 고두심이 과거의 짠하고 희생하는 모성의 초상이라면, 노희경의 초기 드라마를 통해 그려진 윤여정의 엄마는 딸과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엄마의 초상이었다. 실연한 딸에게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라는 대사로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그런 엄마 말이다.

하지만 10대와 20대에 IMF 외환위기를 겪고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부모를 지켜보며 자라온 세대에게 윤여정의 엄마는 또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에게 윤여정의 엄마는 MBC <네 멋대로 해라>에서 고복수의 엄마일 것이다. 이혼 가정에서 자란 고복수에게 엄마는 아픈 손가락이다. 고복수는 소매치기해서 번 돈으로 엄마에게 치킨집을 차려 준다.

한편 고복수의 엄마 정유순은 고복수에게 친절하지만은 않다. 아들을 옆에서 키우지 못한 미안함, 한편 인생이 왜 이렇게 꼬였는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미움들. 이 모든 감정의 복합으로 아들에게 툴툴거리고 때론 곁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대한다. 그런 그녀가 <네 멋대로 해라> 중반에 무너지고 만다. 치킨집을 차려준 아들의 돈이 소매치기로 번 돈임을 알게 된 후였다. 처음으로 아들에게 저녁을 차려준다던 윤여정의 엄마는 결국 소매치기 하지 말라면서 눈물을 쏟는다. 이후 윤여정은 전남편의 죽음을 고복수에게 들은 후에도 또 한 번 눈물을 흘리면서 복수에게 매달린다.

<네 멋대로 해라>에서 윤여정의 눈물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리얼함에 있었다. 배우가 연기의 테크닉이나 감정의 복받침으로 눈물 연기를 소화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벽을 쌓아둔 캐릭터를 꼼꼼하게 연구하고, 그런 캐릭터가 서서히 마음의 벽이 무너지고 눈물을 쏟는 장면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드라마 속 엄마가 아닌 현실에 치여 냉정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던 그 엄마들의 눈물을 본 것이다.

2012년 윤여정은 또다른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한걸음 더 친숙하게 다가간다. 그 해에 그녀는 파격적인 베드신이 있던 영화 <돈의 맛>과 가상의 입헌군주국의 현실을 다룬 MBC <더킹 투하츠>에 출연한다. 그리고 대중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KBS 주말극 <넝쿨째 굴러온 당신>으로 빅히트를 친다. <내 딸 서영이>와 더불어 모든 세대에게 사랑받는 KBS 주말극의 마지막 전성기를 누린 이 주말극에서 윤여정은 본인에게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캐릭터 엄청애를 연기한다.

엄청애는 기존 주말극에서 흔히 보던 시어머니 캐릭터와는 다르다. 며느리를 타박하는 악역이 아니라 며느리와 대화하고 호흡할 줄 아는 시어머니다. 그 때문에 신세대 며느리가 아닌 신세대 시어머니의 롤모델을 각인시킨 캐릭터였다. 또한 보통의 주말극에서 시어머니가 겨우 조연에 머무르던 것과 달리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엄청애는 잃어버린 아들 방귀남(유준상)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로 이 드라마의 눈물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마도 그녀를 대중들과 가장 친숙하게 만든 드라마가 이 작품이 아닐까 한다.

한편 이때부터 윤여정은 칸영화제 참석을 계기로 각종 토크쇼 등의 예능에서 특유의 까칠하고 쿨한 입담을 자랑한다. 그리고 알록달록 과하지 않고 시크하고 세련되게 옷을 입은 장년의 패셔니스타로서의 입지도 다져간다. 심지어 나영석 PD와 만나 <꽃보다 누나>, <윤식당> 등의 예능스타로 거듭나기까지 한다.

그리고 윤여정은 2021년 영화 <미나리>를 통해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아카데미여우조연상까지 받으면서 새로운 드라마를 쓴다. 안방극장에서 2000년대 이후 엄마나 할머니의 역할로 사랑받던 그녀가 할머니 연기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도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에 더해 배우 윤여정의 솔직하고 위트 있는 화법들 또한 화제가 되고 있다. 배우 윤여정의 수상소감과 인터뷰들이 윤여정 주연의 드라마가 된 것이다. 물론 그 드라마 속의 윤여정은 우리가 늘 보아온 그 배우에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큰 상을 받아도 배우 윤여정은 윤여정이 김여정 되겠냐처럼 여전히 쿨하고 까칠하고 가식이 없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영화 <미나리>스틸컷, 명필름, KBS, MBC,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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