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님, KBS는 이런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TV삼분지계의 이 달의 생각]
– ‘오징어 게임’ 말고 KBS가 만들어왔던 것들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의 이달의 생각] ◾편집자 주◾ 21세기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숨가쁘다.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를 다 챙겨보는 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시대, 당장 눈앞의 변화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초점을 잃게 된다. 그래서 TV삼분지계는 생각했다. 매주 방영되는 프로그램 리뷰 말고, 보다 더 긴 호흡으로 TV를 곱씹어 볼 수는 없을까? TV삼분지계는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이야기에 얽매이지 않고, 더 긴 호흡으로 중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TV삼분지계의 이 달의 생각]이다.

“왜 KBS는 <오징어 게임> 같은 걸 못 만드나.”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이하 과방위)의 KBS 국정감사에서 나온 한 국회의원의 발언이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 넷플릭스 가입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시점에 열린 국감이라서 그런지, KBS의 제작역량과 콘텐츠 배급역량을 전세계 190여개 국가에 직접 진출해 서비스 중인 넷플릭스의 그것과 비교하는 질문이 나왔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술렁였다.

국정감사 기간이 원래 날카로운 질문으로 ‘국감스타’가 되고 싶은 국회의원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시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장삼이사도 안 할 법한 질문을 던지는 과방위 소속 의원을 보면서는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왜겠어? 지금 유료 멤버십 기반의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방영된 작품하고 지상파 공영방송을 같은 조건에 놓고 비교한 거야? KBS에서 <오징어 게임>처럼 유혈낭자한 작품을 만들어 방영하면 그게 오히려 방송사고 아닌가?

어쩌면 의원님께서 의정활동이 바빠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을 못 보셨을지도 모른다. 그게 얼마나 잔혹한 수위의 작품인지 직접 보셨다면, 차마 KBS를 향해 <오징어 게임>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주문하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도 KBS도 자신이 언급된 뉴스 정도를 제외하면 챙겨볼 시간이 없으실 지도 모르겠다. KBS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잘 해 왔던 프로그램들, 품은 많이 들고 수익성은 낮아서 다른 상업 방송사들이 쉽게 도전하기 힘든 프로그램들을 얼마나 준수하게 잘 만들어 왔는지에 대해 아신다면, 차마 KBS를 향해 “너희도 <오징어 게임> 같은 거 만들어서 돈도 벌고 실적도 내야 하지 않느냐” 같은 소리는 못하셨을 테니까.

어쩌겠는가,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들은, 최근 KBS가 선보였고 시도해왔던 프로그램들을 하나씩 골라 추천하기로 했다. “우리가 다 <오징어 게임>만 보면서 사는 건 아니라고, 때로는 핑크빛 살육의 판타지보다도 흑백의 역사와 진실에서 더 큰 의미를 찾기도 한다”(남지우)는 걸 말씀 드리고 싶어서.

◆ ‘시대를 바꾼 아티스트-데뷔의 순간’ : 언니들의 노래 따라가다 보면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 <매염방>(2021)은 매염방의 목소리, 시대를 풍미한 대가수의 넓고 깊은 디스코그래피를 통해 홍콩의 역사를 걷는다. 1980년대 문화 전성기, 1990년대 전부를 잠식한 ‘반환’의 그림자, 극심한 정치적 혼돈 속에 맞이한 2000년대, 신종 전염병 사스(SARS)의 발생과 장국영의 죽음이 모두를 충격한 2003년의 그날까지. 우습게도 매염방이라는 이름은 오늘 처음 들어보았고, 이 시기 홍콩과는 한 순간도 포개 져 본 적 없는 내게도 그 쪽 땅이 보이고, 근현대가 보이고, 홍콩이 흠뻑 느껴졌다. 정치가의 연설, 역사가의 해설보다 음악가의 노래를 따라온 덕분일까? 상영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와서 본 KBS1 특집 다큐멘터리 <시대를 바꾼 아티스트-데뷔의 순간>은 바로 이 감정적 진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기획이었다.

지난주, 가수 이미자는 당신 역시 꼬맹이였던 1930~40년대 일제강점기, 그 엄혹한 시대에도 불렸던 민중가요 ‘목포의 눈물’에 대한 구술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는 1950년대 한국전쟁, 그리고 미군정 시기에 ‘피란민 예술가’의 삶을 시작한 윤복희의 증언이 더해졌는데, 그 데뷔의 순간은 앞서 본 매염방의 이야기와 너무 비슷해 신기할 정도였다. 천재 뮤지션들의 삶은 다 닮아있는 걸까. 특히도 여성 연예인들은 엄혹한 시대에 맞서면서, 때로는 그것을 이용하면서까지 치열하게 생존해야 하는 존재라서 그런 걸까. ‘미8군 쇼’와 함께 성장했다는 ‘드러머’ 심수봉의 코멘터리도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다렸다. 지난 추석 공연을 보고 나서, 급작스레 팬이 된 마음은 그런 것이었다.

선배 예술가들의 정신은 1960~70년대 신중현, 김민기, 그리고 쎄시봉에게로 이어졌고, 새로운 장르와 문화가 탄생했다. <데뷔의 순간>은 정권을 잡은 군부가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긴급조치를 시행하는 장면을 끝으로,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절반 분량을 이틀에 걸쳐 거뜬히 소화한다. 익숙지 않은 이름들과 엄청난 분량의 레퍼런스, 구슬픈 옛 가락으로 가득한 이 다큐 시리즈가 젊은 시청자들에겐 매력적이지 못할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만 하더라도, 그들은 <모던 코리아>를 지지하고, <오월의 청춘>을 사랑하고,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에 열광했던 바. 사실 나는 <한가위 대기획-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 마저도, 가족이 아닌 익명의 트위터 유저들의 실시간 중계와 해설, 그리고 앓는 소리와 함께 관람하기도 했다. 우리가 다 <오징어 게임>만 보면서 사는 건 아니라고, 때로는 핑크빛 살육의 판타지보다도 흑백의 역사와 진실에서 더 큰 의미를 찾기도 한다는 것을 한 편의 영화와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남지우 칼럼니스트 Instagram @jmbar_jwjw

◆ ‘오늘부터 무해하게’ : 예능을 통해 환경을 생각하다

최근 배우들의 우정 여행 프로그램 여럿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방송을 시작했다. tvN <해치지 않아>, <슬기로운 산천생활>, <바퀴 달린 집>, 소소한 차이는 있겠으나 틀은 <삼시세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세 프로그램 모두 산 좋고 물 좋은 호젓한 장소를 찾아가 며칠 간 밥 해먹고 지내는 추억 놀이니까.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머무는 곳들이 죄다 나름 청정 지역이 아닌가. 출연진에 스태프들까지, 인원이 줄잡아 수십 명 이상일 텐데 촬영으로 발생하는 생활 쓰레기는? 남은 음식물은 말끔히 처리하고 오는 걸까? 하나하나 되짚어보지만 환경을 염두에 두는 행보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번 주 방송을 시작한 KBS <오늘부터 무해하게>는 다르다. 제목부터 환경을 걱정한다.

<오늘부터 무해하게>(연출 구민정)에서 배우 공효진, 이천희, 전혜진이 한 주일 동안 생활한 충남 죽도는 태양열 발전으로 에너지 자립 78%에 달하는, 탄소 제로를 지향하는 섬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들의 목표는 탄소 발생 최소화. 완벽할 수는 없겠으나 청정 지역을 오염시키는 일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출발한다.

무엇보다 KBS2 <인간의 조건 시즌1>과 동일한 의지여서 반가웠다. ‘음식 남기지 않기’, ‘하루에 물 20리터로 살아가기’, '생활 쓰레기 없이 일주일 살아보기' 등, 인간다운 삶의 진짜 조건은 무엇인지 숙고하게 만드는 미션들 덕분에 텀블러와 장바구니를 사용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던 기억이 난다. 환경을 걱정하는 예능을 다시금 살려낸 KBS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오늘부터 무해하게>가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데에 한 몫 해주길, 더 나아가 부디 <인간의 조건>처럼 용두사미가 아니길 바란다.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다큐 인사이트’ : 어제의 아카이브 속에서 오늘의 변화를 읽어내다

1961년 ‘국영 서울텔레비전방송국’이란 이름을 달고 한국에서 두 번째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지 60년, KBS가 쌓아온 영상 기록의 양은 한국의 그 어느 방송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한국인들의 삶의 조건과 생활양식, 사고방식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 왔는지 엿볼 수 있는 살아있는 현대사 아카이브인 셈이다.

2011년 <천하장사 만만세>부터 2018년 <88/18>에 이르는 일련의 스포츠 다큐멘터리에서 KBS가 쌓아온 아카이브 푸티지를 활용해 시대의 흐름을 개괄하는 작업을 선보여 온 이태웅 PD가 교양국에 합류해서 함께 만든 <다큐 인사이트> ‘모던 코리아’ 연작(2019~ )은, KBS의 영상 기록만 활용해도 우리가 겪어온 변화들을 개괄하고 그를 통해 내일로 이어지는 경향성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 작품이다.

아카이브 속에서 진주를 건져 올려 새로운 의미망을 설계하는 아카이브 푸티지 다큐멘터리 작업은 ‘모던 코리아’ 연작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은규 PD가 선보인 세 편의 여성 다큐멘터리 연작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개그우먼’(2020), ‘다큐멘터리 윤여정’(2021), ‘다큐멘터리 국가대표’(2021)는 한국 사회에서 개그우먼이, 여성 연기자가, 여성 국가대표 스포츠 선수들이 어떤 편견과 차별을 딛고 성장해 왔는지를 짚어내는 걸출한 작품들이었다.

“시대를 잘 만나서 물을 만났다고 하는 건 너무 좋은 칭찬이지만, 시대를 잘 만난 게 아니라 시대를 바꾼 거다. (박나래와 안영미는) 시대를 바꾼 사람 아닌가.”(김숙, ‘개그우먼’ 편),

“그녀는 생존자다. She’s a survivor.”(뉴욕타임즈, ‘윤여정’ 편),

“그런 시선을 만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잘못됐다는 거죠. 남자와 여자를 나누기 전에, 갖고 있는 능력(을 봐야죠).”(박세리, ‘국가대표’ 편)

KBS의 아카이브는 물론, 타사의 영상자료들까지 수집해가며 한국의 언론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여성들을 어떤 식으로 대접해 왔는지 꼼꼼하게 짚어내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이 세 편의 연작들은 한국 사회의 여성 인권 수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자 훌륭한 소셜 코멘터리가 되었다. 상업성을 높여야 한다는 압박이나 트렌드를 숨가쁘게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회사만이 가능한, 실로 공영방송이니까 가능한 작업들이었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영상·이미지=KBS. 그래픽=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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