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8’, 코앞의 닥친 미래에 대한 한국적인 상상력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웨이브(wavve)MBC, 한국영화감독조합과 영화사 수필름이 공동으로 기획, 제작, 배급하는 시네마틱드라마 <SF8>은 여러 모로 독특한 작품이다. 여덟 명의 한국 영화감독들이 각각 한편 씩 45~50분짜리 SF 단막극 8편을 만들어 공개하는 <SF8>, 각각이 개별적인 독립성을 지닌 단편영화인 동시에 SF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동시대 한국이 마주하고 있는 시대적 고민들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하나의 테마를 공유는 앤솔로지 드라마이기도 하다. 지난 710일 웨이브를 통해 이미 감독판이 공개됐고, 814일 민규동 감독 연출작 <간호중>을 시작으로 매주 금요일 MBC에서 TV판이 방영될 예정이다.

아직 <SF8>를 만나보지 못했을 시청자들을 위해, 웨이브를 통해 한 발 먼저 작품을 만나 본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가 고심해서 추천작들을 골랐다. 정석희 평론가는 미세먼지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줄어들고 빈부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청춘물 <우주인 조안>, 김선영 평론가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미래에 과연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 심리극 <인간증명>, 이승한 평론가는 지구종말에 맞서 들고 일어난 초능력자들의 모험을 그린 로맨틱코미디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를 골랐다. 인류의 명운을 위협하는 악당이나 눈이 휘둥그레 해지는 비주얼은 없지만, 한국적인 SF를 구현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찬 이 여덟 편의 영화들은 지금 웨이브에서, 혹은 814일부터 매주 금요일 MBC에서 만나볼 수 있다.

<우주인 조안> - 2046년이 아니어도 이미 그런 세상

감독: 이윤정 / 원작: 김효인 <우주인 조안> / 주연: 최성은, 김보라

‘2046년의 미세먼지로 가득한 지구. 인류는 CN으로 나눠졌다. 태어날 때 고가의 미세먼지 항체 주사를 맞은 C(clean)들은 예상 수명이 100세인 반면, 그렇지 못한 N(Not clean)들은 기대수명 30세에 맞춰 살아간다.’ <SF8> 세 번째 에피소드 <우주인 조안>의 배경이다. 2046년이면 내가 존재하지 않을 터, 코로나19 전이었다면 아마 무심히 봤을 게다. 그러나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상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네 살짜리 손녀가 유치원에서 내내 마스크를 착용하고 지내다가 현관에 들어서야 겨우 벗는 생활을 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주인공 이오(최성은)와 조안(김보라)의 삶이 어쩌면 어린 내 손녀가 마주하게 될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평생 C로 살아온 스물여섯 살 대학생 이오는 병원 측의 오류로 항체 주사를 맞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생후 6개월 이내에 맞아야 효력이 있는 주사인지라 이제는 백약이 무효해진 것. 그로 인해 N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고 학교의 유일한 N, 강화청정복도 입지 않는 조안과 가까이 지내게 된다. 둘의 수업 시간, 교수의 대사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미세먼지가 우리를 뒤덮은 후로 우리세대는 더 이상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직접 그 장소에 가보는 여행을 하지 않잖아요.”

2046년이 아니어도 이미 그런 세상이다. 이오는 조안과 함께 피아니스트인 조안 언니(이설)의 거리 공연을 보러 가는가 하면 함께 빗속을 뛰어다니는 등 순간순간을 만끽한다. 서른 살이면 끝날 인생이기에 대학 따위를 다닐 필요도 없고 사실상 그 즈음이면 부모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N들의 삶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오가 말한다. “조안처럼 빛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조안이 조안이 아니게 되면 그 빛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오, 너도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야!

정석희 TV 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인간증명> -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

감독: 김의석 / 원작: 이루카 <독립의 오단계> / 주연: 문소리, 장유상

가까운 미래, 마침내 죽은 자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급작스러운 차 사고로 사랑하는 아들 영인(장유상)을 잃은 혜라(문소리)는 아들을 되살리기 위해 AI 기업의 기술 실험에 지원한다. 겨우 살아남은 뇌 일부와 인공지능을 결합해 생전과 같은 모습의 안드로이드로 다시 태어난 영인은, 그러나 이전과는 미묘하게 달라 보인다. 아들의 귀환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혜라는 어느 순간부터 안드로이드가 그녀 모르게 영인을 소멸시키고 아들인 체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SF8> 여덟 번째 에피소드 <인간증명>은 죽음이 더는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지 않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명 연장이 가능해졌고, 이로써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려졌다. <인간증명>은 바로 이 희미한 경계를 통해 SF 장르의 오랜 테마인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저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랜 고민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으나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되살아나게 된 영인은 이 같은 의문 속에서 괴로워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인이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이는 그의 그릇으로 제작된 안드로이드, 모델명 A-796(장유상) 뿐이었다.

드라마는 A-796소유주혜라도 모르게 인간 김영인을 소멸시켰다는 혐의로 법정에 앉은 장면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극 중 배경은 안드로이드가 변호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권리는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소유물 개념 안에 갇혀 있는 세상이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재판이라는 형식은 기계에 불과한 안드로이드가 실은 얼마나 인간다운 존재일 수 있는가를 자연스럽게 증명하는 설정으로 기능한다. 그는 영인과 교감하면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산책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감각하는 존재로 진화했다. <인간증명>은 그렇게 삶이 무의미했던 인간과 생의 고통까지 끌어안고 싶어 하는 안드로이드의 대비를 통해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성찰케 한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herland@naver.com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 - 이토록 심드렁한 종말이여

감독: 안국진 / 원작: 김동식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 / 주연: 이다윗, 신은수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운석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한 상황, 지구인들은 남은 일주일을 사랑하는 이들과 보내는 데 전력을 다 한다. 아포칼립스물들이 그리는 혼란 따위는 없고, 빨리 퇴근해 가족이랑 밥이나 한끼 더 했으면 하는 자포자기의 평온함이 세상을 지배한다.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가 그리는 종말은 이처럼 심드렁하다.

김동식 작가의 동명 원작소설은 시간을 뛰어넘는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서로를 보고 첫 눈에 반한 선남선녀 남우와 혜화가 사랑과 초능력의 힘으로 시간을 몇 번이고 돌려 종말을 막아보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진실한 사랑을 찾는다는 내용은 뒤틀림 없이 정석적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안국진 감독이 그린 세상은 조금 다르다. 기본 설정은 원작과 다름이 없지만, 안국진 감독은 구비구비 블랙코미디를 심어 내용을 조금씩 뒤틀어 둔다. 그렇게 뒤틀린 세상은 희한할 정도로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닮았다.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는 도입부부터 그 톤이 원작과는 다르다. NASA가 운석을 막기 위해 미사일을 발사한다는 뉴스를 전하면서 뉴스 앵커(배해선)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모였다고 하는데, 연구진 중에 한국인은 없냐는 질문을 제일 먼저 던지고, 스튜디오에 초대된 과학자는 심드렁한 말투로 애석하게도 한국인은 없는데, 평소 이공계를 천시했던 한국 사회의 병폐의 결과라 말한다. 종말을 앞두고도 한국인이 뭘 얼마나 뛰어나게 잘했나를 체크해야 직성이 풀리는, 실적주의에 미친 한국사회를 쿡 찌르며 시작하는 작품은 등장인물 설정 또한 원작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남우(이다윗)는 지난 4년 간 고시원에서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느라 다른 인간과 기본적인 친교 관계조차 없이 살아온 모태솔로고, 그를 보는 혜화(신은수)의 눈은 사랑은커녕 영 못 미덥다는 불신으로 가득하다.

흔히 한국에서 SF물이 실패하는 이유로 한국인들이 SF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림이 어색하다는 점을 들곤 한다. 한국인이 인류의 운명이나 첨단 과학을 논하는 그림이 낯설고 어색하다는 것이다.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는 한국적인 일상성을 착실하게 쌓아 올린 덕분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래, 이 쪽이 맞지.”하고 종말과 초능력으로 가득한 SF 판타지를 우리의 일상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wavve, MBC, 한국영화감독조합, 수필름. 그래픽=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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