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기로운 의사생활’, 현실의 중량감은 어디에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이우정 작가와 신원호 감독의 다섯 번째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사람냄새 나는 풍경’ 판타지로 가득한 작품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나 <슬기로운 감방생활> 또한 비슷한 판타지로 이루어진 작품이었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다소 상황이 다르다. 1990년대를 처음으로 회고의 대상으로 호출해 낸 <응답하라> 시리즈나,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휴먼드라마라는 점에서 비교할 대상이 많지 않았던 <슬기로운 감방생활>과 달리,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병원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휴먼드라마들과의 비교를 피하기 어렵다. 대중적인 인기 면에서는 몰라도, 최소한 평가 면에서는 전작들보다 더 냉정한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들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반응은 다소 갈린다. 우선 정석희 평론가는 이 작품이 ‘판타지일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선량한 의사들은 흩어져 있을 뿐 분명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의사들이라 말하며 이 작품이 의사와 병원 이용자들 사이의 간극을 좁혀줄 수 있는 일종의 안내지침서가 되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표했다.
반면 김선영 평론가는 일상의 사랑스러움을 담아낸 건 좋지만, 단편적으로 흩어진 에피소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환자들의 사연이 의사들의 매력을 돋보이게 만드는 도구처럼 소모되는 순간이 많다는 걸 지적했다. 이승한 평론가는 이 작품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판타지를 제공하는 건 좋지만, 현실적인 고민을 모조리 제거하는 바람에 최소한의 중량감도 없어서 보고 돌아서면 금세 휘발된다고 지적했다.

◆ 흩어져 있을 뿐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는 의사들
최근 몇 년 간 내 일로, 또 가족 일로 인근 병원은 물론이고 종합병원까지 두루 섭렵했다. 새벽녘 북새통인 응급실 행차도 해봤고 수술실 문 앞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그간 마주한 의료진이 수십, 아니 수백 명은 되고 남을 게다. 그러나 의료진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던 기억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오히려 서운한 기억이 더 많다. 본래 열 번 잘하다 한 번 삐끗해도 그 기억만 유독 생생한 것이 사람 심리가 아니던가.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주인공 다섯 의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양 좋은 의사들이다. 이익준(조정석) 선생이 어르신 환자의 끝없는 수다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응대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우리 집 어르신들의 하소연을 쌀쌀맞게 끊어 내치던 의사들이 생각나서 다시금 울화가 치밀었다. 저렇게 해드리면 좀 좋아!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대기 중인 환자라든지 여러 여건으로 봤을 때 적당한 선에서 끊는 것이 옳다.
따라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에피소드들은 판타지일 수 있다. 실제로 입원 환자들이며 보호자들이 드라마를 보며 어이없어들 한다고.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는 의사들이다. 드라마처럼 모여 있지 않고 흩어져 있을 뿐. 뇌손상 어린이 환자 보호자에게 팩트를 전달했다가 안정원(유연석) 선생에게 질책을 받은 레지던트 장겨울(신현빈)처럼 환자에 대한 배려를 배우지 못해서일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의사를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교과서가, 환자 입장에서는 의사들과의 소통을 돕는 안내서 노릇을 해주리라 믿는다. 무엇보다 전미도를 선두로 신현빈, 안은진, 곽선영 등 앞날이 기대되는 연기자들이 많아서 반갑다.
정석희 TV 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랜덤 노래방 같은 종합병원 이야기
국민건강보험제도가 탄탄한 한국에서, 병원은 특별한 곳이라기보다 일상적인 장소에 조금 더 가깝다. 분명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삶을 끝내는” 극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는 계절처럼 반복되는 흔한 통증을 달래기 위해 가는 곳이다. 대부분의 의학드라마가 병원의 그 희소한 ‘특별함’에 초점을 맞출 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기존의 이야기가 놓친 일상적 측면을 주목한다는 면에서 인상적이다. 긴박하게 실려 온 환자 위에 올라탄 의사가 온 힘을 다해 심폐 소생술을 하는 장면처럼 의학드라마의 극적인 클리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석형(김대명)과 준완(정경호)이 매점 앞에서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초코우유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처럼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을 담백하게 포착한 장면들이 사랑스럽다.

하지만 회당 80분을 단편적인 장면으로만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려 20년을 함께 한 ‘99즈’ 5인방의 과거와 개개인의 서사도 제대로 풀리지 않은 채 5회에까지 이르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에피소드는 언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될까. 또는 준완과 익순(곽선영)의 러브라인처럼 제작진만 알고 있던 서사를 어느 날 갑자기 팝업북 펼치듯 툭 튀어나오게 하는 것을 정말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더 큰 문제는 환자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그토록 유난스럽게 굴었던 환자의 보호자(엄혜란)가 마침내 아이를 잃던 날 정원(유연석)에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던 장면, 겹쳐진 비보에 삶을 비관했던 여인(황영희)이 아들의 간이식 수술을 무사히 끝낸 송화(전미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 등 감동적인 에피소드도 있다. 그러나 장겨울(신현빈)의 멋진 반전과 정원과의 러브라인을 위해 노숙자의 다리에 구더기를 들끓게 한 장면처럼 환자를 도구적으로 묘사하는 순간도 넘쳐난다. 이야기의 큰 줄기 없이 단편적으로 소모되는 에피소드는 주요 인물들의 매력을 보조하는 랜덤 노래방 반주 음악처럼 흘러가고 있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herland@naver.com

◆ 입 안에서 금방 녹아 사라져버리는 무게 없는 판타지
권력 다툼에 여념이 없고 의술만큼이나 정치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의사들이 못해도 하나 둘은 등장하는 한국형 메디컬 드라마들과 달리,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종합병원 의사들이 겪는 하루하루의 소소한 희로애락으로만 채워져 있다. 기존의 한국형 메디컬 드라마 또한 ‘병원에서 흰 가운 입고 연애하는 사람들 이야기’였던 옛 공식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이다.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판타지를 만들기 위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선량한 사람들을 전진배치했다. 병원을 소유한 율제재단의 막내아들 안정원(유연석)은 VIP 병실에서 나온 수익과 제 월급을 탈탈 털어 경제 사정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병원비를 대신 내줄 만큼 환자가 우선이고 물욕도 없는 사람이다. 정원의 엄마 정로사(김해숙) 여사 또한 병원의 지배권을 포기한 아들의 선택에 토를 달지 않는 호탕한 사람이다. 정원 대신 새로운 이사장이 된 주종수(김갑수)는 로사와 절친이자 병원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호인이고, 종수의 사촌 동생이자 병원장인 주전(조승연) 또한 종수와 함께 로사네 집에서 멸치 똥을 따며 시간을 보낼 만큼 성정이 한가한 사람이다.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판타지를 가능케 하기 위해, 병원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과 돈이 몰려 있는 수뇌부를 온통 선량하고 순한 사람들로만 채운 것이다.
큰 긴장이나 불쾌함 없이 훈훈한 판타지를 소비할 수 있는 건 나름의 미덕이겠으나, 실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매일 마주해야 할 실체적인 고민들이 말끔하게 휘발되어 있는 탓에 최소한의 중량감도 사라졌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지속 가능한 병원 운영을 위해 병원의 수익률을 압박하는 경영진도 없고, 수술비가 없다는 이유로 그냥 돌아가는 환자의 뒷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쓸쓸함도 없으며, 오로지 휴머니즘만 내키는 대로 다 발휘하고 나면 다른 고민이 필요 없는 안전한 판타지의 세계.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긴 하는데, 돌아서니 기억이 가물거린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tvN, 그래픽=이승한]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TV삼분지계
webmaster@enter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