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의생’ 이우정·신원호 콤비가 실패를 모른다는 건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신원호 사단은 역시 실패를 모른다. <응답하라> 시리즈와 <슬기로운 감빵생활>에 이어 선보인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시청률은 6%대로 시작해 5회 만에 두 자릿수를 넘어섰다. 2년 만에 돌아왔지만 여전하다. 늘 그렇듯이 이우정 작가와 손을 잡고 ‘사단’이라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익히 알려진 자신의 캐릭터를 기반으로 주조연 및 카메오로 등장해 반가움을 더한다. 휴먼드라마의 울림과 시트콤 문법에 충실한 코미디 연출을 유려하게 배치하는 국내 최고 수준의 완급조절도 여전하다.

새로운 작품이지만 세계관도 일정 부분 유지된다. 주인공인 5인방을 99학번 의예과 동기이자 교내 밴드 활동을 함께한 20년 지기로 설정하면서 ‘응답하라 1999’ 버전의 추억을 틈 날 때마다 소환한다. 이를테면 브릿지 헤어에 힙합이 가미된 프레피 패션, ‘Lonely Night’,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아로하’ ‘밤이 깊었네’ 등의 당시 바이브로 감성의 모닥불을 피운다. 케빈 스미스 감독이 자기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든 하키 사랑을 펼치는 것처럼 이우정 작가의 프로야구 사랑도 여전히 주요한 모티브다. 주요 출연자 이외 환자나 스텝들의 배역은 대부분 프로야구 선수의 이름을 차용해 지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달라진 지점이다. 우선, 앞선 작품들과 달리 이우정 작가가 작가진에 단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그간 배경 자체부터 신선했던 신원호 사단의 행보와 달리, 의학 드라마라는 기존 장르에 도전했다. 최근에만 해도 <낭만닥터 김사부2>가 흥행한 바 있고 저 멀리 <하얀거탑>이란 금자탑이 있는 꽤나 익숙한 무대다. 물론,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하얀거탑>과 같은 권력 암투도, <김사부>같은 의술로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수술 장면의 실감나는 재현 등 전문성으로 승부를 보는 메디컬 드라마의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나라 의학 드라마의 대표 클리셰라 비판받는 병원에서 연애하는 러브라인을 적극 수용한다(다만 남녀주인공 사이의 러브라인이 아니라 주조연간의 여러 커플을 만들어내는 이색적인 방식을 취한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1회에서 12회를 아우르는 큰 줄기의 이야기가 없다는 데 있다. 주연 5인방이 서사의 기반이긴 하지만 그들도 일부일 뿐, 이들이 뭉쳐서 거대 악과 맞선다거나, 그들 사이에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식의 기승전결로 모아지는 기존의 드라마 스토리텔링을 따르지 않는다. 베일에 싸인 캐릭터들의 과거를 내비치고 추리하게끔 만드는 이우정 작가 특유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여전히 작동하긴 하지만 ‘어남택’ 시절과도 차이가 있다. 양석형(김대명)이 마마보이가 된 사연이나 대학시절 채송화와 누가 썸을 탔는지 등은 주요 플롯이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슬기롭고 놀라우며, 이토록 세련된 이유는 우리나라 드라마 중 거의 유일하게 특정한 사건에서 발화된 서사 없이도 매우 풍부한 감정을 담은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작법의 큰 틀은 미국 시트콤에서 본 듯 한데 담고 있는 세계관과 정서는 우리네 주말 드라마보다 더 가족적이고 따듯하다. 큰 사건사고와 갈등 없는 대신 환자, 보호자, 간호사, 인턴, 실습 나온 의대생, 레지던트, 교수 등등 병원에 오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대형 뮤지컬처럼 펼쳐낸다.

그래서 에피소드, 장면마다 주인공이 달라지고, 그런 짧은 상황들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의 매력이 발견되고 발산된다. 납득이 캐릭터에 진지함을 더한 조정석, 까칠한 캐릭터에 인간애를 더한 정경호, 뚱한 캐릭터 안에 단단히 자리 잡은 사려 깊음을 보여주는 김대명, 팔방미인 배우 전미도의 발견뿐 아니라 도재학(정문성), 장겨울(신현빈), 추민하(안은진), 이익순(곽선영) 등 조연캐릭터들도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일반적 드라마와 달리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없고, 등장인물이 워낙 많다보니 누가 누구인지 처음에는 헷갈릴 수 있으나 이 부분은 매회 방송 후 홈페이지 등장인물 소개를 업데이트하면서 보완한다. 마치 초창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보듯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대화와 에피소드가 점조직처럼 연결되는 스토리텔링이다.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진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힌 신원호 감독의 말처럼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의 사명감, 환자를 생각하는 가족의 소중한 마음과 사랑, 슬기로운 사회생활, 오랜 우정, 자기 일에 최선과 열정을 다하는 전문가의 책무, 일상의 활력, 풋풋한 로맨스와 삶의 탄생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사 희로애락에 깃든 풍부한 감정들을 병원이란 무대 위에서 담아냈다. 병원을 배경으로 하면서 평균 연령 68세의 마피아게임 같은 시퀀스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가장 큰 매력지점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시트콤 작법에 큰 영향을 받은 웃음부터, 휴머니즘을 불러일으키는 가슴 뭉클한 사연의 눈물까지 시청자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주요 사건과 갈등으로 빚어진 줄거리가 없는 대신 사람 사는 이야기와 현실적인 공감대가 있다. 이런 진일보한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신원호 사단의 드라마는 이제 기존 장르 문법에 개의치 않는 하나의 장르로 거듭났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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