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바마’, 같은 결말을 향하더라도 더 좋은 길이 있었을 텐데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이번 주에 종영한 <하이바이, 마마>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어느 누구도 이 드라마의 설정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콜리지의 용어를 빌린다면 ‘불신의 유예’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 설정은 무엇인가. 교통사고로 죽은 주인공 차유리(김태희)는 귀신이 되어 5년 동안 가족 곁을 떠돌다가 갑자기 사람이 된다. 그 구역 유령들을 담당하는 무당인 미동댁(윤사봉)에 따르면, 49일 안에 자신의 원래 자리를 되찾으면 유리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남을 수 있다.
판타지 세계에서는 별별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일 자체는 이 세상에서 흔해 빠졌다. 단지, 주인공이 돌아와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이들이 주인공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어진다. 이들이 유리와 남편 강화(이규형), 재혼한 아내 민정(고보결)과의 삼각관계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저기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나요? 막 죽은 사람이 멀쩡한 몸으로 돌아왔는데요?”

불신의 유예를 끌어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처럼 당시 과학에 기반을 두고 최대한 그럴싸한 설명을 끌어들이는 방법도 있고, 노엘 카워드의 <유쾌한 유령>처럼 설정의 어처구니없음을 무심히 드러내 코미디의 재료로 삼는 방법도 있다. 정답은 없고 개별 테크닉이 중요하다. <하이바이, 마마>에서는 이 테크닉이 심하게 떨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월드 빌딩으로, 드라마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추가 설정을 만들어내고 우선순위를 재조정한다. 이렇게 설정이 불안해지면 캐릭터의 심리를 따라잡기가 어려워진다.
<하이바이, 마마>가 ‘불신의 유예’를 위해 동원하는 가장 큰 무기는 배우들의 연기와 존재감이다. 김태희는 경력의 상당기간 동안 연기력을 의심받아왔던 배우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거의 이상적이다. 일단 아무리 이상한 일이 주인공에게 일어나도 관객들이 아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스타 파워가 있다. 김태희 주변에 배치된 고보결, 이규형, 신동미, 김미경 등과 같은 배우들은 허약한 설정을 아주 진지한 연기로 받아치는데, 그러다보니 연기가 진행되는 동안 잠시나마 그 의심을 접을 수 있다. 이는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드라마 내에서 어느 것도 제대로 온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이바이, 마마>는 코미디 요소를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감동과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에 이는 큰 문제가 된다. 믿을 수 없는 세계에 기반을 둔 감동은 쉽게 공허해진다.

그래도 잠시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보자. 드라마가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바이, 마마>는 끝맺음의 드라마다. 삶과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귀신이었던 차유리는 잠시 지상에 머무는 동안 갑자기 중단된 삶을 마무리지을 기회를 얻게 된다. 그건 남아있는 가족에게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에서 설정의 문제, 이 때문에 흔들리는 캐릭터의 심리를 지적했지만, 이 이야기의 교훈 자체는 문제가 없으며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다.
<하이바이, 마마>가 차유리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드라마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가장 중요한 건 딸 서우(서우진)다. 하지만 그 다음에 와야 할 것 같은 남편 강화는 뒤로 계속 밀린다. 드라마 내에서 유리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단짝 친구 현정(신동미)이고 그 다음이 남편의 새 아내인 민정이다. 남편의 존재가 가벼운 게 아니라, 유리의 인간관계는 비교적 공평하고 넓게 펼쳐져 있고 이는 그냥 사실적이다. 유리가 자신에게도 조금 더 관심을 가졌다면 좋았겠지만 사회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 이는 조금 어렵지 않았을까. (그래도 유리 공방 장면이 나왔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끝맺음의 과정에서 유리가 자신의 뒤를 이어 서우의 엄마가 될 민정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크리스 콜롬버스의 <스텝맘>이 떠오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 감상의 습관이 그 기회의 발목을 잡는다. 예를 들어 많은 시청자들은 남자 주인공, 그러니까 남편의 존재가 꼭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남편이 두 여자에게 갖는 감정이 혼란스럽고 모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를 깔끔하게 정리하기를 바란다. 이는 개연성의 문제는 아니다. 단지 사람이 그렇게 명쾌하거나 단순한 존재가 아닐 뿐이다. 드라마가 산으로 갔던 것도 아니다. 엄마의 자리를 넘겨주는 과정은 처음부터 중요했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질 가치가 있었다. 이성애 로맨틱 코미디의 우선순위가 모든 이야기에 적용되는 건 아니다.

기왕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 것, 처음부터 솔직하게 패를 풀고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고, 특히 민정 캐릭터는 그 덕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의 결과물은 시청자들만큼이나 작가 역시 고정된 로맨틱 코미디 장르 관습이 잡힌 결과물로,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감정은 고정된 틀 안에 갇혀 계속 길이 막히고, 늘 캐릭터의 입을 통해 변명되고 설명된다. 같은 결말을 향하더라도 더 좋은 길이 있다. 단지 그 길을 가려면 익숙한 기대를 보다 확실히 즈려밟고 넘어갔어야만 했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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