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난폭한 로맨스’가 그린 마녀의 사랑
[엔터미디어=신주진의 멜로홀릭] 얼마 전 <난폭한 로맨스>가 끝났다. 불균질하고 불친절한 드라마, 그럼에도 끝까지 놓을 수 없었던 이 드라마의 마력은 끝내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공백들을 남긴 채 끝났다. 느슨하고 쉽게 터지지 않는 로맨스, 코미디와 스릴러의 분열적 중첩, 중심인물의 난삽한 이동과 배치.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로맨틱코미디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기대와 욕구를 결코 충족시키려들지 않았다. 감미로운 사랑의 판타지는 끝까지 유예되었고,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마녀 양선희(이보희)에 대한 단호하고 흡족한 단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는 끝까지 반복적으로 살아남아 깊고 슬픈 울림을 만들어냈다.
“무열이한테 전해주세요. 미안하다구, 감히 사랑해서...”
“공주의 사랑은 동화가 되고 마녀의 사랑은 저주가 되죠.”
박연선 작가는 지난해 이맘때 ‘특목고괴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통해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었다. 괴물은 괴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괴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이들 안의 괴물이 깨어나는 순간, 그것은 밀폐된 공간 안에 넣어진 아이들이 생존을 위해 서로를 의심하고 배신하는 시험에 드는 순간이다. 그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연쇄살인범이 되어 쫓기는 정신과의사 김요한(김상경)으로, 그는 아이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선생에 다름 아니었다. 아이들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와 사투를 벌였고, 자신들을 괴물로 만들려는 그 절대 악인과 사투를 벌였으나, 최종적으로 그 지배자 괴물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괴물이 됨으로써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김요한이 절대적 권력을 지닌 초월자로 명백히 드러난 존재였다면, <난폭한 로맨스>의 양선희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가시화되지 못한 존재이다. 10년 넘게 사고뭉치 야구스타 박무열(이동욱)의 도우미로 살아온 그녀는 이름대신 ‘이모’라 불리는 존재였고,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만 무열에 대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열이 옛연인 종희(제시카)와의 이별에 아파하는 동안, 경호원인 은재(이시영)에 대한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무열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범죄를 숨기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숨기려한 것이다. 젊고 멋진 남자에 대한 나이든 여자의 늙고 추한 사랑, 그것은 감추고 가려져야만 한다. 그러나 감추고 가려진 것은 어느 순간 기괴한 모습으로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난폭한 로맨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김요한이 그러했듯 양선희가 사람들 내부의 괴물을 끌어내는 방식이다. 그녀는 무열이 힘들고 좌절에 빠질 때에만, 자기의 보살핌에 의존할 만큼 무력해졌을 때에만 온전히 자기 차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열을 위기와 곤경에 빠뜨린다. 그 방식은 바로 제 3자를 이용하는 것이다. 무열 가까이에 있는 인물들의 시기와 질투, 경쟁심과 열등감을 부추기거나, 그의 부와 명성을 동경하거나 시기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그녀는 무열에 대한 자신의 비틀린 사랑이 다른 이들의 내재된 그것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무열의 끔찍한 지기들, 오수영(황선희), 진동수(오만석) 등이 한순간 섬뜩하고 낯선 괴물로 돌변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그렇게 우리 안의 괴물, 내 안의 잠재된 낯선 타자를 끌어낸다. 우리 내면의 심연과 맞닥뜨리게 해주는 것이다. 자멸의 방식으로 실현한 양선희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그렇게 '난폭한 로맨스'는 무열과 은재의 사랑에 덧붙여 양선희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스토커 양선희의 사랑이 배타적이거나 독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매력적이다. 그녀는 사랑을 분할한다. 단지 외롭고 힘든 무열만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나아가 그 사랑이라는 정체의 모호하고 불확실한 이면을 드러내준다. 결국 무열과 은재의 사랑이 합의된 이후에조차 그 사랑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불안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그녀의 시험이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자신도 잘 모르던 무열의 진심이 튀어나올 거라는 것이다. 양선희는 무열로 하여금 죽음 앞에 놓인 종희와 은재 중 한 사람을 살려야하는 시험에 들게 함으로써 은재를 사랑이라는 감정의 두려운 불투명성에 빠져들게 한다.
은재 친구 동아(임주은)의 말처럼 사랑이 깊을수록 두려움도 커지고 의심도 강해지는 것이다. 사랑과 죽음, 사랑과 두려움, 사랑과 의심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다. 따라서 양선희가 파놓은 깊은 함정은 사랑의 심연을 드러내주는 것이자, 사랑의 완결성에 구멍, 공백을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저주스러운 마녀의 사랑은 동화 같은 사랑의 판타지에 깊은 외상을 새겨 넣었다.
칼럼니스트 신주진 joojin913@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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