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넝쿨’, 주말드라마의 혁명 이룰까?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형식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건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장르가 바뀌어버린 드라마가 있다. 바로 대가족이 등장하는 일일·주말연속극이다. 애초 이 장르는 현실의 가족상을 반영한 정통 멜로드라마였을 테지만 지금은 어느새 판타지에 가까워졌다. 핵가족이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이 1980년대. 할아버지, 할머니에 아버지의 형제들, 거기다 혼기가 차서도 독립하지 않은 3대까지 죄다 모여 사는 풍경은 현실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진지 이미 오래다.

이 비현실적인 가족구성을 20년이 훨씬 넘도록 일일·주말극은 좀처럼 포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판타지라고 할 밖에. 이는 물론 노년. 그리고 장년층을 위한 판타지다. 허구한 날 지지고 볶아도 좋으니 슬하의 식구들이 모두 모여 살기를 바라는 원념이 거기에 담겨 있다. 일주일의 7일이 일요일이면 좋겠다는 것이 학생들과 직장인들의 판타지라면, 1년 365일이 명절이었으면 좋겠다는 부모 세대의 서글픈 판타지가 오늘날의 가족극에 스며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대와 불화하는 가족극들이 판타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몇 되지 않았다. 하나는 그것이 판타지가 아니라 이데아라고 포장하는 것. 그러니까 현실에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구성이 바람직한 가족의 가치를 대변한다는 게다. 현재 방영중인 <내일이 오면> 김정수 작가의 드라마들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그녀의 드라마에는 언제나 부잣집(주로 여자 쪽)과 평범한 소시민 가정(주로 남자 쪽)이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작가의 기획의도가 맞닿아 있는 곳은 언제나 대가족 구성에 가까운 소시민 가정이다. 두 번째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들처럼 현실적인 이슈를 반영한 캐릭터들을 배치하는 것. 하지만 이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구심점은 대개 부모세대에 있기 마련이었다.

KBS 2TV의 새 주말극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이채로운 부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이 드라마의 첫 회는 결혼한 여성들이 모여 지난 명절기간 동안 시집살이한 것을 토로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저마다 친구들의 불평이 끝나면 주인공 차윤희(김남주)의 눈이 클로즈업되며 그녀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시집을 안 갔으면 안 갔지. 내 인생에 시집살이는 없을 거라 그랬잖니.”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시점이다. 그러니까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장차 사건의 무대가 될 대가족, 즉 방 씨 집안으로부터가 아니라 비록 한시적이지만 국외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대개 주말드라마의 도입부가 설정 시퀀스로서, 가족구성 캐릭터들을 소개하는 요식적인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도 이색적이지만, 드라마의 타깃을 부모 세대가 아니라 이제 갓 결혼한 젊은 주부에게 겨냥하노라고 선언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다소 파격에 가까운 신선함을 안겨준다. 첫 발을 이렇게 뗀 이상, 장차 차윤희의 시집살이가 시작된다고 해도 그 시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두 번째로 이채로운 점은 인물구성에 있다. 이 드라마에는 시트콤에 가까우리만치 이상한 캐릭터들이 잔뜩 등장한다. 늘 현학적인 허세를 늘어놓지만 현실에서는 형님의 식탁에 빌붙는 궁리 뿐인 대가족의 둘째 아들(김상호)부터, 백치미를 자랑하는 그의 아내(심이영), 기상천외한 논리로 자신의 외도를 정당화하는 첫째 사위(김형범), 그리고 은근히 나른한 개그 콤비인 엄마의 두 친정 동생(유지인, 양희경) 등등. 이상하다는 표현을 썼으나 이들의 대사와 행동이 보여주는 디테일은 어디선가 본 듯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 리얼리티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종전의 주말드라마 속 캐릭터들과 명확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실과 유리된 판타지라는 후천적 한계 탓인지 가장 일상적이어야 할 일일·주말연속극의 캐릭터가 실은 가장 보수적인 편이다. 말인즉슨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인물들 투성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들 삼형제가 있다고 하면, 저마다 대비되는 성격으로 설정된 형제들은 그 설정 아래에서 예측 가능한 범위의 행동들만 하기 마련. 현실적인 이슈를 반영한 캐릭터들 또한 그러한 상징성에 발목이 잡혀 자유롭지 못한 편이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도 그렇듯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분명 존재하나(과묵하나 성실하고 속 깊은 아버지라든가) 가족 단위마다 포스트로 배치된 ‘이상한’ 캐릭터들은 그 경직된 가족극의 분위기를 뒤엎고도 남는다. 이쯤 되면 대가족이라는 낡은 설정은 아무런 문제도 아닌 것이다.

알다시피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두 편의 미니시리즈 <내조의 여왕>과 <역전의 여왕>을 쓴 박지은 작가의 첫 번째 주말드라마 데뷔작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이 드라마의 이채로운 특징들은 사실 좋은 미니시리즈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극중 차윤희는 장차 대가족에 편입되어 시집살이를 시작하겠지만 며느리로서 그녀가 보여줄 모습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행보 그대로, 가족극의 틀에 편입된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미니시리즈스러운 특질들도 강고한 장년층의 판타지에 쉬이 굴복하지 만은 않을 듯하다. 이는 아마도 최근 몇 년 간의 주말드라마 트렌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노정이 될 것이다.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로고스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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