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비>, 사기꾼 커플을 우국지사로 만들다니..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읽는 동안 ‘와, 이건 영화화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있는데,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가 바로 그런 책들 중 하나이다. 엄청 재미있거나, 엄청 완성도가 높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은 지나치게 빨리 쓴 티가 나며 후반부는 ‘이게 다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임팩트가 떨어진다. 하지만 소설은 매력적인 여자주인공과 흥미로운 소재, 꼭 화면으로 보고 싶은 장면들을 갖추고 있어, 영화로 옮기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소설의 불완전성은 각색자에게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영화로 옮기는 동안 새 장르에 어울리는 보다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영화를 찍으며 책장을 넘기던 관객들은 장윤현의 [가비]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만족하는 사람은 소수가 아닐까 싶다. 장윤현이 김탁환의 소설을 각색하면서 택한 과정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진부하며, 그 때문에 괴상하다. [노서아 가비]라는 소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소재가 전혀 진부하지 않다는 것이니 말이다.
[노서아 가비]는 무슨 소설인가. 아관파천 시절의 구한말을 살면서 애국심 따위는 관심도 없으며, 오로지 왕을 등쳐먹을 생각만 하는 사기꾼 커플 이야기이다. 이런 소설의 태도는 신기하고 매력적이다. 이 당시를 그린 한국 소설이나 영화는 나라를 잃은 울분으로 비분강개하는 주인공들로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김탁환은 정치나 외교에 관심도 없고 심지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도 그리 강하지 않은 코스모폴리탄 주인공들을 툭 풀어놓는다.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고종을 위해 일한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란다. 다시 말해 영화 만드는 사람들에게 [노서아 가비]는 신천지다. 남들이 만들지 않은 신기한 영화가 나오기 직전이다.
하지만 장윤현은 이 모든 장점들을 접고 거꾸로 간다. 이 소재를 가지고 습관대로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비분강개 주인공들이 나오는 역사극’을 만드는 것이다. 아마 그의 생각엔 이게 당연한 것이었나보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까. 아마 그는 김탁환이 원작소설에서 실수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믿는 건지도 모른다. 아마 그는 영화가 그 이야기를 바로 잡을 기회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를 다루는 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결코 재미로 즐길 시기는 아니다. 하지만 역사의 어느 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이 시기를 오로지 같은 태도로만 일관하는 것과 시대를 진지하게 보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노서아 가비]는 당시 비분강개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혼란기를 기회로 삼았던 악당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인 이반은 심지어 실존인물이 모델이다. 러시아어에 능통해 고종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만심에 빠져 설치다가 귀양형을 받고 왕을 독살하려고 한 천민 출신 역관 김홍륙이 바로 그 실존인물이다. 결코 좋아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는 데에 문학적으로 유용하다. 그가 주인공이라고 옹호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인물들이 있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정말 당시엔 그런 사람들이 살았으니까. 이런 인물들을 그림으로써, 구한말을 그리는 허구의 세계는 지금까지 비어있던 빈칸을 채우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 아닌가. 어떻게 비분강개하는 지사들만 허구한 날 보나.

허구의 인물이지만 여자주인공 따냐도 마찬가지로 유용하다. 우선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있다. 구한말 조선인이면서도 여러 개의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코스모폴리탄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악당들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여걸인데다가, 실력 있는 바리스타란다. 당연히 한 번 그려보고 싶지 않은가? 게다가 이 인물의 비정치성은 그렇게 비정치적이지도 않다. 무작정 비분강개하는 지사 주인공들과는 달리 따냐는 정치적 관점을 배재한 채 당시의 비극적인 시대 속을 힘겹게 버텨내는 외로운 홀아비인 고종을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따냐의 관점은 비정치적이지만 그 결과물은 또 다른 것이다. 역시 재미있는 기회이다.
그런데 장윤현은 둘 다 안 한다. 소설 속에서 자유분방하고 뻔뻔스러웠던 따냐와 이반은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다국적 음모의 희생양이다. 처음부터 개인으로서 책임을 반쯤 접고 들어가는 거고 당연히 자신의 의지를 과시할 구석도 없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조국에 대한 자기네의 배신행위 때문에 괴로워하고, 결국 말 달리는 선구자가 되어 침략자들과 맞선다. 반역죄로 참수된 역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인물이 이런 식으로 변한 것이다. 이쯤하면 거의 농담처럼 보인다.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 역사를 보라고 원작소설을 주었더니 그 이야기를 개작해서 진부한 이야기에 끼워맞춘다? 누군가가 “이건 뭐가 이래요!”라고 말해주어야 하지 않았나?
이것이 장윤형의 불타는 애국심 때문이라고도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의심이 있다. 그는 송혜교가 나왔던 [황진이]의 감독이기도 하다. 그건 그가 조선시대를 살았던 가장 자유분방하고 자유로웠던 여성을 ‘노비혁명가의 여자친구’로 축소시킨 경력이 있다는 말이 된다. [가비]를 보면서도 슬슬 [황진이]의 데자뷔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각색과정 중 따냐의 의지는 위축되거나 축소되고 그러는 동안 느끼한 선구자의 옷으로 갈아입은 남자주인공은 점점 부풀어만 간다. 처음이라면 실수이다. 두 번째도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면 감독의 여성관을 슬슬 의심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는 자주적이고 재미있는 여자주인공이 그냥 싫은 것일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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