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왕>, 엉성해도 아직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엔터미디어=신주진의 멜로홀릭] 잔뜩 기대를 모았던 <패션왕>이 매우 불안한 출발을 알렸다. 오래 기다려온 <발리에서 생긴 일>(이하 <발리>), <신입사원>의 이선미·김기호 작가에 대한 반가움이 앞섰고, 지금 충무로와 TV를 오가는 가장 핫한 배우들, 유아인, 이제훈, 신세경 등의 포진으로 기대 수위가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막 펼쳐진 <패션왕>의 차림새들은 엉성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패션’에 어긋나는 진부한 스타일들이 못내 아쉬움을 남긴다.

사실 드라마들이 선호하는 화려한 직업세계인 패션계는 요즘 잘 나가는 방송계가 그러하듯이 너무 많이 다루어서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그렇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천부적 디자인 감각을 지닌 강영걸(유아인)이 우연히 수선한 빈티지 코트가 명품으로 둔갑하는 장면은 차마 보기 민망하다. 뉴욕 로케이션을 마치고도 패션산업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은 안이한 발상과 연출 때문이다.

가영(신세경)이 내쫓기는 화재사건이나 도망자 신세인 영걸이 얽혀든 선상반란, 재혁(이제훈)과 안나(권유리)의 야심찬 패션쇼 등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아무런 임팩트 없이 스케치처럼 펼쳐진 것은 초반 배경 설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꽤 실망스럽다. 구태의연한 에피소드들의 문제는 그 자체로 흥미가 떨어진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것이 캐릭터 구축의 실패를 가져온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사실 <패션왕>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캐릭터들이다. 전작들에서 주·조연 할 거 없이 생생한 캐릭터들로 드라마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왔던 작가들의 역량은 이 드라마에 와서 힘을 잃었다. 팥쥐모녀 조마담(장미희)과 정아(한유이)의 단선적 캐릭터는 작가들의 초기작인 그 옛날 <별은 내 가슴에>의 팥쥐모녀 송여사(박원숙)·이화(조미령) 커플의 다이나믹한 코믹성에 한참 못 미친다. 팥쥐모녀가 단순 악역을 담당하는 순간 가영 캐릭터의 매력 역시 가련한 콩쥐 수준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초반 몇 회를 거치는 동안 네 명의 주인공은 각자의 계급적 위치와 조건을 힘겹게 부여받았지만, 아직 캐릭터의 매력을 온전히 부여받지는 못했다. 유들유들하고 뻔뻔하지만 온갖 고초 속에서 오기와 야망을 키워갈 영걸의 성격이 어느 정도 드러난 데 비해, 성실하고 단단하게 현실을 감내하는 가영이나 상처 입은 차갑고 외로운 안나, 그리고 모든 걸 가지고도 부족한 듯 조급하고 초조해 보이는 재혁의 성격은 아직 불명료하고 불안하다. 첫 회부터 캐릭터의 매력이 뚜렷이 부각되지 못한 드라마는 그만큼 위험 요인을 안고 출발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족한 드라마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 드라마가 <발리> 이후 변화된 계급 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패션왕>은 <발리> 이후 8년이 지난 현재의 계급갈등의 지형도를 그린다는 것이다. <발리>에서 세계적인 팍스그룹의 차남 정재민(조인성)의 형 정일민을 연기했던 김일우는 이제 <패션왕>에서 정재혁의 아버지 정만호로 나타났다. 그룹 후계자가 되기 위해 비리와 술수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이제 아들 재혁을 혹독한 후계자 수업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패션왕>은 재벌가의 아들조차 잠시도 안주할 수 없는 참혹한 계급갈등의 세계를 설정했다.

<발리>에서 재벌가 자제들은 한량에 가까운 유한계급의 모습이었다. 재민은 허울뿐인 팀장으로 무심한 날나리에 가까웠고, 영주(박예진)는 재벌가 안주인에 걸맞은 갤러리의 우아한 차기 운영자였다. 여기서 계급갈등은 단지 사랑 때문에 사랑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재민의 수정(하지원)에 대한 사랑이나 영주의 인욱(소지섭)에 대한 사랑은 그들 사이의 계급적 간극으로 인해 (불)가능한 것이었다.

<발리>가 사랑과 소유욕망을 (불)가능하게 하는 계급갈등의 현실, 계급관계 그 자체, 그 생래의 조건에 대한 탐구였다면, <패션왕>은 그 현실 속에서 각자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는 네 남녀의 치열한 생존기로 바뀌었다. 이제 현실은 타고난 것만으로, 주어진 것만으로 존속되는 게 아니다. 네 사람은 모두 자기자리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

재혁은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능력을 검증받아야만 하고, 판매사원에서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 자리에 오른 안나는 자신을 인정해줄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위태로운 딜을 해야만 한다. 가영은 생계를 위해 싼값에 품을 팔면서도 자신의 꿈을 위해 모질게 스스로를 단련해야만 한다. 그리고 불운하게 밑바닥 삶을 전전해온 영걸은 더럽고 불합리한 세상을 탓하면서도 한순간에 부여잡을 운을 좇을 것이다.



이들이 모두 내쫓긴 인물들이라는 사실은 이들 각자의 생존 위기를 말해준다. 영걸은 조폭 두목을 피해 밀항했고, 가영은 화재 누명을 쓰고 조마담에게 내쫓겼으며, 안나는 재혁 집안의 반대로 버림을 받았고, 재혁은 아버지의 명령으로 뉴욕지사로 좌천당했다. 게다가 이들이 뉴욕생활을 접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것은 각자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이다. 영걸은 선상반란 연루로 실형을 살고, 가영은 패션스쿨에서 쫓겨나며, 재혁과 안나는 브랜드 런칭에 실패한다.

생존의 위기와 고난 속에 서로 도움과 민폐를 주고받고, 갈등하고 경계하고 오해하고 원망하는 등 이리저리 얽혀들면서도, 이들은 심지어 쉽게 사랑에 빠지지도 못한다. 현실은 더욱 각박해졌고 이들의 처지는 그만큼 여유도 멋도 없어졌다. 이들이 사랑보다 먼저 계급갈등에 빠져들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영걸과 재혁의 대결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리라는 사실이 이들의 생존투쟁의 위급함을 말해준다.

이제 네 사람의 사각 사랑이 본격화될 것이고, 네 사람의 처지와 신분을 가르는 계급갈등은 그들 사이에 엇갈리는 사랑과 욕망, 경쟁과 질투로 인해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코믹함이 빠져버린 계급갈등의 세계는 그만큼 팍팍하지만, 점점 힘겨워지는 현실 속 생존경쟁의 위기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걸과 가영의 도전이 손쉬운 성공기로 빠져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칼럼니스트 신주진 joojin913@entermedia.co.kr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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