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션 프로그램, 슬픔 최소화의 원칙
-오디션 쇼 경쟁 과정, 잔인해도 친절하다?
[엔터미디어=우석훈의 대중문화 파토스] 최근에 흔히 예능이라고 부르는 버라이어티쇼의 성공 요소에 대해서 분석할 기회가 있었다. 매우 독특한 형식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문화 여러 분야 중에서 지난 수 년 동안 혁신이 가장 많이 일어난 분야가 이 분야이기도 하다. 집단 MC의 도입, 리얼리티 쇼 도입, 여기에 야외 촬영의 전격적 도입, 어쨌든 드라마나 영화 혹은 연극과 비교하면 가장 많은 형식 실험이 진행된 분야가 버라이어티 쇼이기도 하다.
유행 주기도 짧고, 패턴 파괴도 강하다. 버라이어티쇼의 흐름은 역시 리얼리티 쇼 형식을 성공시킨 <무한도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무한도전>의 성공 요소에 대해서는 제작진과 경영진의 색다른 분석이 있는데, 이건 다음 기회에…)
버라이어티 쇼는 외국에서는 다큐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는 전형적인 리얼리티 쇼의 형식으로, 수많은 시나리오와 연출이 있지만, 이걸 예능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같은 형식이지만, 한국에서는 버라이어티 쇼의 한 표현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디션 쇼가 공중파에 들어온 것은 최근이지만, 외국에서의 성공 치고는 좀 뒤늦게 들어온 감이 있다. 타이라 뱅크스의 <도전! 슈퍼모델>을 아주 재밌게 봤었고, 장윤주가 진행하던 프로도 재밌게 봤다. 두 가지 사이의 미세한 느낌의 차이가 있다면, 제작자나 진행자가 탈락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부드럽게 달래고, 참가 자체가 영광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할 것인가, 그런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엎어치나 메어치나”, 탈락이라는 사실 자체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그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일부에서는 승자독식의 한국 사회가 극단적 경쟁에 응모자들을 내모는 이런 쇼에 열광하게 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는 것 같다. 한 편으로는 타당성이 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을 찾을 수밖에 없는 한국 버라이어티 쇼의 구조상, 오디션 쇼의 단계를 거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양식이 영원할 거라는 보장도 없다. 한 때 스쳐가는 유행,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효리를 가수에서 예능인으로 만들어준 <쟁반 노래방>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식이었지만, 이제 그걸 새롭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없고, 출연진들도 같은 포맷의 반복에 상당히 질리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디션 쇼에는 분명히 지독할 정도의 경쟁, 승자승이라는 철학이 있지만, 동시에 다른 어떤 버라이어티 쇼도 가지지 못한 덕목 한 가지는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상품이라는 표현을 쓰면, 한국의 버라이어티쇼는 신인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아주 높은 일종의 2차 시장이다. 배우든, 개그맨이든, 아니면 가수이든, 이미 대중들에게 충분히 알려진 사람들이 자신의 명성이라는 자신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갈 수 있는 시장이 버라이어티 쇼의 특징이다. 이미 너무 잘 알려져서 굳이 자신을 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기꺼이 망가지며 대리 만족을 주는 시장, 그런 특징이 있다. 그런데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면? 예능 출연은 언감생심이다. 그 진입장벽을 낮추어준 것에 대한 대가가 지독할 정도로 혹독한 비판과 비난 그리고 날 것 그대로의 눈물을 보여야 하는 비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비용, 이득 그리고 승률이라는 확률 변수, 이 세 가지로 도전자들의 도전 동기 그리고 제작진의 토너먼트 혹은 리그 방식,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경제적으로 설명이 된다.
그렇다고 굳이 이렇게 로마 시절의 검투사들의 배틀 로얄을 연출하면서까지, “잘 난 놈은 살아남는다”는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는가?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지만 그게 문화의 속성이기도 하다. 문화는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반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더 반영되기도 하고, 때로는 덜 반영되기도 한다.
승부가 조작된 영화 <퀴즈쇼>와 같은 억울한 상황이 아니라면, 오디션 쇼는 최소한 왜 내가 떨어지는지, 이유도 알려주지 않는 취업 과정에 비하면 훨씬 자상하다. 사장 아들, 장관 딸, 실세 친척, 이런 사람들에 밀려서 그냥 떨어진 사람들은 왜 자신이 떨어졌는지, 인사담당자로부터 한 번도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애꿎은 자기소개서만 백만번씩 고쳐 쓴다고 한들, 뭐가 문제였는지, 뭐가 불만족이었는지,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했을 그 취업준비생들이 느꼈을 당혹감과 모멸감에 비하면 TV의 오디션 쇼는 그 경쟁 과정이 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차라리 친절한 것 아닌가?
김광식 감독의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에 대해서 소감을 써달라는 부탁을 이런저런 경로로 몇 번 받았는데, 아직도 쓰지 못했다. 영화는 재밌었지만, 어쨌든 죽어라고 매달려서 정규직으로 취직을 해야 삶도 번듯해지고 결국에는 애인도 만나게 된다는 얘기 아닌가? 만약 취업을 못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산다면? 그러면 결국 사랑하게 된 애인도 만날 수 없다는 얘기 아냐? 이게 내가 이 영화에 대해서 가졌던 불만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미덕은, 면접 과정이라는 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치사하고 더러운 것이며, 고압적으로 느끼게 만드는지, 그걸 정말 ‘지대루’ 보여줬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의 20대들이 겪는 일상사가 바로 <내 깡패 같은 애인>에 드러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지금의 오디션 쇼가 현실보다 더 잔인하지는 않다. 조금만 괜찮은 회사는 수 십대일은 기본이고, 100대 일 넘어가는 것도 잠시다. 최근 방송사 입시 경쟁률이 조금 떨어졌는데, 매 년 뽑던 걸 격년으로, 그나마도 90년대에 비하면 거의 1/10로 줄여서 뽑다보니, PD 등 취업준비생들이 아예 포기한 게 경쟁률이 내려간 이유라는 게 내 잠정 분석 결과이다. 왜 떨어졌는지, 경쟁의 기준도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오디션 쇼를 보고 열광하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부탁하고 싶다. 탈락한 사람의 눈물에 스포트라이트를 대지는 말아주세요! 그 순간 그가 느낄 낭패와 실망감 그리고 서러움에 값싼 동정을 보내는 그런 잔인한 시청자로 우리를 만들지 마시길. 현실의 우리는 단 한 명인 승자보다는 탈락자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고, 가슴을 조리면서 본다고 해도, 가슴 속에 씁슬함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타이라 뱅크스가 좋은 제작자이며 동시에 좋은 진행자라고 느꼈던 것은, 세밀한 연출로 탈락자의 아픔을 최대한 줄여주고 감춰주고, 또 그에게 ‘세컨 챈스’, 제 2의 기회가 열릴 수 있는 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당분간 오디션 쇼의 형식이 버라이어티 쇼의 한 축이 되기는 할텐데, 시청자의 열광만큼 탈락자들의 슬픔이 가득 배이게 된다. 우승자의 열광을 높이기 위해서 탈락자의 아픔을 높이는 것은, 우리 모두를 너무 잔인한 사람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기회라는 게 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슬픔 최소의 원칙, 이런 걸 오디션 쇼에서 구현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에는 시청률이 높은 방송이 오래 살아남을 것 같지만, 너무 잔인하고 슬픔이 가득 차면 결국 시청자들의 손이 돌아가게 된다. 10년쯤 지속되는 성공한 오디션 쇼가 되기 위해서는 승자의 영광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탈락자의 슬픔을 최소화하는 연출이 필요할 것이라고, 이 연사, 강력히 외칩니다!
2011년 한국, 우리는 살면서 슬픔이 너무 많다. 좀 웃자고 버라이어티 쇼를 보는 건데, 그 수많은 탈락자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건 좀 슬픈 일 아닌가?
칼럼니스트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honortomeadows@entermedia.co.kr
[사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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