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맛있는 인생>, 알면서 속는 것이 바로 인생

[엔터미디어=신주진의 멜로홀릭] 사람들이 흔히 알면서 속는 두 개의 영역이 있다. 사랑과 가족이 그것이다. 일일극이건 주말극이건, 대부분의 가족드라마들이 다루는 것이 바로 알면서 속는 그 사랑과 가족이다. 저 사랑이 얼마나 힘들지 알면서 기어이 그 사랑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사랑이며, 아무리 사고를 치고 말썽을 부려도 절대 버리지도 벗어나지도 못하는 것이 가족이다. 그렇게 사랑과 가족은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는,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살이를 대변한다.

최근 들어 드라마가 복수극과 복수극이 아닌 드라마로 양분될 정도로, 그토록 복수극이 난무하는 것도 점점 더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때문이다. 복수극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망,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성취하지 못한 성공 등 뜻대로 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원인과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김으로써 분노와 불안을 달래는 것이다. 그렇게 복수극들이 보여주는 명쾌한 인과응보의 논리는 예측불가, 통제불능의 세상을 지배하려는 역설적 의지의 산물이다.

이와는 달리 복수극이 아닌 정통 가족극들은 그 책임을 개별 인물들의 성격에서 찾는다. 이미 기원전 500년 전에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가 ‘성격이 운명’임을 간파했다고 하듯이, 모든 인간들은 제 운명을 제가 만들기 마련이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면서 혹은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인 것처럼. 제 발등을 제가 찍고, 제 무덤을 제가 파는 것이다.

SBS 주말연속극 <맛있는 인생>(김정은 극본, 운군일 연출)은 그렇게 뜻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살이를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정통 가족극이다. 한식당 남도옥의 베테랑 주방장 장신조(임채무)에게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속을 썩이는 네 딸이 있다.

큰딸 승주(윤정희)는 잘 나가는 종합병원의 레지던트 의사로, 신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진중하고 믿음직한 맏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할 생각도 없고 보라는 선보는 자리에 동생을 대신 내보내는 식으로 아비의 속을 태운다. 그런 그녀가 유부남인 같은 병원 강인철 과장(최원영)과 연인 사이라는 것은 장신조가 알면 까무라칠 일이다.

둘째 딸 정현(류현경)은 취직도 못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 백수다. 승주 대신 선보러 나가는 소일로 푼돈을 뜯어내는가 하면, 당구가 취미에 엄청난 주당인 그녀가 아비에게 골칫덩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가 승주인 척하고 만난 민태형(정준)과 러브라인을 형성하면서, 신조와 원수지간인 민용기(김학철)가 태형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부녀관계는 더욱 험악해질 것이다.

셋째 딸 주현(유다인)은 신조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집 나간 딸이다. 그녀는 친딸이 아닌 데려다 기른 딸인데, 사춘기 때 그 사연을 알게 되면서 방황과 반항 끝에 가출을 했다. 남자 잘못 만나 사채빚에 쫓기는 오갈 데 없는 처지인 그녀는 신조를 가장 큰 위기로 몰아간다. 게다가 아무 것도 모르고 주현을 좋아하기 시작한 재복(박윤재)은 신조에겐 아들 같은 존재지만, 천애고아에 전과가 있는 그가 금쪽같은 주현과 맺어지는 것은 신조가 결코 원치 않을 일이다.

막내 미현(혜리)은 어린 나이에 아빠를 끔찍하게 챙기는 효녀지만, 그럴수록 엄마 없이 큰 막내딸에 대한 신조의 애틋함과 미안함은 가슴 한 편을 짓누른다.



<맛있는 인생> 속 딸들은 아버지가 바라는 삶을 살지도 아버지가 원하는 길을 가지도 않는다. 거의 모든 자식들이 부모의 뜻대로 되지 않고, 부모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하는 것처럼. 그리고 신조는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내 생각대로 되나.” 단지 딸들 뿐이랴.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을 더 많이 살수록,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점점 더 진리가 되어 간다.

그렇다고 그 딸들이 항상 자유롭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후회하지 않을 최선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왜 승주는 뻔히 알면서 멀쩡하고 잘난 재혁(유연석) 대신 유부남인 인철을 원하는가. 병원장 사위인 그가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면서 왜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나. 왜 주현은 말도 안 되는 개망나니 형진에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뒤치닥꺼리를 해주나. 그가 돈을 요구할 때, 사채빚을 떠넘길 때, 왜 그를 거부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왜 재복은 그런 바보 같은 주현에게 마음이 쓰이는 걸까. 왜 마음을 주기 시작하나. 왜 신영(유서진)은 이미 마음이 떠난 남편 인철을 포기하지 못하나. 왜 모두 그런 어리석은,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 걸까. 왜 우리는 알면서 제 발등을 찍고, 제 무덤을 파는 길을 선택하는가.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끌려가는 것일까.

“배운 대로, 아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움직여지는 마음이었으면 선생님에 대한 제 마음 벌써 정리했을 거예요.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매일 같이 일하고 같이 만날 수 있다는 거, 그게 참 좋아요.” 승주는 인철에게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의 모순은, 그리고 삶의 모순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따로 놀고, 머리와 가슴이 따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 모순투성이의 어리석은 선택들, 그것의 결과는 그 모든 선택의 결과를 자신이 고스란히 떠안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격이 운명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것이 어떤 파국이나 비극을 낳더라도, 종국에는 설사 후회와 회한만 남을지라도. 한줌의 행복을 위해, 한 순간의 열락과 만족을 위해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러한 길을 간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맛있는 인생>은 말한다.


칼럼니스트 신주진 joojin913@entermedia.co.kr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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