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빅>, 공유의 매력으로도 도저히 구해낼 수 없는
[엔터미디어=신주진의 멜로홀릭] 홍자매(홍정은·홍미란)의 판타지로맨스는 가끔 삑사리가 난다. 재작년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의 문제가 이번 드라마 <빅>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됐다. 두 드라마의 가장 큰 공통점은 초현실적 판타지라는 점이다.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는 납량물도 아닌데 여자주인공의 정체가 구미호였고, <빅>은 17세 소년과 성인 남자의 영혼체인지가 중심모티프이다.
사실 판타지형식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요즘은 타임리프나 영혼체인지 같은 시공을 뒤섞고 정체성에 혼돈을 가하는 탈현실의 욕망이 팽배한 시대이므로. 게다가 <시크릿 가든>이나 <옥탑방왕세자> 같은 성공한 판타지드라마들도 많지 않은가.
그런데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 이어 <빅>도 판타지형식 자체가 드라마의 발목을 잡는 경우이다. 판타지 형식에서 비롯된 갈등, 즉 여자친구가 여우라는 것이나 두 남자의 영혼이 바뀌었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엄청난 갈등을 만들지만, 유감스럽게도 초반 강도가 센 만큼 그 효과가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시청자들이 일단 그 황당한 설정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나면 설정 자체가 주는 갈등의 힘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갈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실상 굉장히 많은 공이 들어가야 하고, 다른 장치들이 필요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홍자매의 이들 판타지로맨스는 굉장히 안이하다. 그 반짝이는 아이템(빌려온 것이기는 하지만)의 효과를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인물들은 판타지라는 손쉬운 장치 안에 갇혀 맴돌고, 갈등은 좀처럼 긴장도 추진력도 얻지 못한다.
대신에 이들은 예쁜 로맨스를 만들기에 급급하다. 물론 홍자매의 인물들은 항상 사랑스럽다. 그 시기의 가장 예쁘고 멋진 배우들을 기용하여 사랑스런 인물들을 만들고 정말 예쁜 그림을 만들어낸다. 신민아와 이승기, 이민정과 공유의 조합만으로도 얼마나 예쁜 그림이 나올지는 안 보고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쁜 그림만 가지고는 로맨스가 살아나지도 사랑이 깊어지지도 않는다.
<빅>의 경우, 초반 갈등의 구축은 나름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결혼을 앞둔 길다란(이민정)과 서윤재(공유) 사이의 뭔가 흔쾌하지 못한 균열, 부담스러운 동료 여자의사 이세영(장희진)의 존재, 미국에서 날라온 어린 강경준(신원호)과 교사인 다란의 잦은 부딪힘, 경준을 뒤따라온 장마리(배수지)의 무대책 등 서로 다른 성격과 상황의 배치가 기대를 갖게 했다. 이어 사고로 인해 윤재와 경준의 영혼이 뒤바뀌면서 다섯 인물의 갈등이 복잡하게 꼬였고, 숨겨진 관계의 진실이 드러날까 하는 긴장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5,6회부터 긴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준의 몸에 깃든 윤재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서윤재라는 인물이 사라졌고, 뒤이어 세영이 힘을 잃어갔으며, 마리마저 단지 걸리적거리는 불필요하게 분주한 인물로 전락했다. 남은 건 다란과 ‘윤재의 몸을 한 경준’, 두 사람 뿐이다.

윤재와 경준을 합체한 이 문제의 인물은 정체의 혼란과 이중적 위치로 인해 다란과 충분히 흥미로운 갈등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윤재의 몸과 경준의 영혼을 합체한 이 인물이 자신의 내부의 갈등을 너무 쉽게 정리해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이 강경준이라고 생각하는 이 인물이 너무도 능숙하게 서윤재인 척 서윤재 역할을 맡아하면서(심지어 17세 소년이 독학으로 의학공부를 하여 부분적으로 의사역할까지 한다), 한 사람 안에서 두 인물이 만들던 내부의 긴장과 갈등은 사라져버렸다.
그 결과 더 큰 문제는 다란과 ‘윤재의 몸을 한 경준’의 로맨스가 의도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하며 의도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 로맨스의 핵심 갈등은 다란이 윤재가 아닌 경준을 사랑하게 됐다는 데서 오는 것인데, 아무리 경준이라고 우겨도 시청자는 그 인물을 윤재가 아닌 경준이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다란이 사랑하는 것은 ‘윤재의 몸을 한 경준’이인 것이지, 결코 경준이의 몸을 한 경준이는 아닌 것이다. 그는 윤재도 경준이도 아닌, ‘윤재의 몸을 한 경준’이라는 전혀 새로운 존재, 제 3의 인물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물은 오로지 공유라는 배우의 매력으로 이루어졌다. 서윤재도 강경준도 아닌 공유라는 배우가 만든 새로운 인물. 성숙한 남자의 몸에 십칠세 소년이 깃든. 사랑스러운 공유의 원맨쇼를 보는 것도 나름 즐겁기는 하다. 이 드라마의 패착은 어쩌면 공유라는 배우에게 과도하게 의존한 데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다른 인물들을 모두 죽여버렸으니까, 그래서 결국 드라마 자체도 죽어버렸으니까.
캐릭터를 살리지 못했다는 건 홍자매에게 치명적이다. <마이 걸>, <환상의 커플>, <최고의 사랑>이 모두 캐릭터의 매력으로 빛난 드라마들임을 감안할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막판에 이르러 윤재와 경준의 출생의 비밀이 풀리면서 갈등이 되살아났으나, 상황을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게다가 윤재와 경준의 뒤바뀐 영혼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다면, 다란과 ‘윤재의 몸을 한 경준’의 로맨스는 깨질 수밖에 없다. 이 난국은 과연 어떻게 마무리될 수 있을까.
칼럼니스트 신주진 joojin913@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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