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추적자>, 어떻게 <나꼼수>보다 한 발 더 나갔나
- <추적자>와 <나꼼수>, 기막힌 평행이론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추적자>가 남긴 가장 큰 영향은 뉴스를 보면서 막연하게 상상했던 그 이면을 이미지화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어떤 국회의원이 무언가를 발표하고, 검찰이 이해불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면 그 전날 어떤 누가 서 회장(박근형)이나 강동윤(김상중)처럼 전화 한 통을 넣었는지, 그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선거철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실제 모습도 그려볼 수 있게 됐다. 최근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 중인 대선주자가 족발을 보고 ‘이것이 바로 서민음식이다’라고 서민음식의 카테고리를 정의한 것이나, 대통령께서 시장만 방문하면 오뎅을 드시는 것과 비슷한 장면을 강동윤과 그의 부인 서지수(김성령)가 그대로 재현한 것도 그 중 하나다. 그러면서 뉴스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서민행보 코스프레의 전후 디테일까지 그럴듯하게 잡아냈다. 뉴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이런 묘사들 덕분에 <추적자>는 현실의 디테일을 제대로 그렸다는 시청자들의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만약 <추적자>가 2010년 이전에 나왔다면 이런 수준의 패러디와 비꼬기가 지금과 같은 시청률과 공감대를 얻진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추적자>의 묘사와 서사가 기시감을 넘어선 현실성을 갖게 된 것은 2011년의 한 사회 현상이 만들어낸 학습효과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추적자는 외형상 <24시>와 <대부> 혹은 <테이큰>과 같은 장르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구전으로 전해진 또 다른 원작이 있었던 것이다.
<추적자>는 누군가에게는 확실히 불편한 드라마다. 어쩌면 그 어떤 드라마보다 장르적 성취를 위해 현실을 극화했다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계추를 1년 전으로 되돌려보면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그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든 <나는 꼼수다>도 그런 존재였다. 그들의 태도와 이분법적 진영논리에 동의하든 안 하든 그들을 지지하든, 지겨워하든 <나는 꼼수다>가 2011년 정치를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 것은 명백한 현상이었다.
그들은 어렴풋이 짐작하던 위선자들의 위선과 윗동네의 꼼수를 낄낄거리며 까발렸고, 이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누구나 지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는데 정확히 뭐가 잘못됐다고 하지는 못하겠고, 도대체 왜 저런 대통령을 뽑았는지 회의적이거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상황에 <나는 꼼수다>는 손가락질할 수 있는 대상을 구체화했다. 또한 배설을 넘어선 승리의 서사가 있음을 선동(혹은 설파)했다.
<추적자>의 근간을 이루는 권력계층의 묘사와 국민의 상식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서사는 이런 <나는 꼼수다>를 통해 학습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꼼수다>가 있었기에 현실성과 공분의 정서를 획득한 디테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추적자>는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한오그룹을 매우 대담한 묘사로 그려낸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한오그룹의 힘이 나라 전체에 어디 안 미치는 곳이 없는데,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들에게 불법으로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함이다. 유일한 아킬레스건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권, 검찰을 비롯한 각계각층에 한오 장학생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경영권 승계에 관한 도덕적 문제가 생기니 회장에서 퇴임하는 척한다. 경영권 때문에 형제들과 갈라선 역사가 있고, 회장은 막내딸에게 미움을 받는다. 서 회장의 딸이 장남인 오빠에게 “오빠가 손 된 건 다 망했다”고 말하는 대사까지 있는데 이처럼 꽤나 적나라하다.
검찰에 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뉴스만 보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검찰의 움직이는 방식과 진급을 위해 발버둥치는 검사의 생리, 절대 공평하지 않은 사법체계, 대형 게이트마다 수많은 꼬리들이 등장하는 까닭 등은 물론, “검사를 받고 일해서 검사”라는 대사에서는 아예 비수를 꽂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화 한 통에 태도를 바꾸는 언론사, 대통령 당선이 최종목표가 아닌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이라는 범인들에게는 실로 놀라운 설정은, 모두 <나는 꼼수다>에서 집중적으로 들은 이야기들이다.
결정적인 것은 투표율이 높아지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추적자>의 세계관이다. 투표율에 따른 유불리를 본격적으로 따지게 된 것은 지난해 <나는 꼼수다>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승리의 법칙과 일맥상통한다. 언제나 약자 입장에 있는 국민의 정의와 상식이 승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투표율, 즉, 더 많은 국민들이 참여할수록 승리한다는 논리는 오세훈 시장을 물러나게 한 학습 경험을 통해 신념이 됐다. 또한 새누리당이 압승한 지난 총선 결과를 통해 다시 한 번 투표율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추적자>는 이 투표율을 가장 극적인 장치로 사용했다. 세상이 미쳐 날 뛰는데 내가 할 것은 이것 밖에 없다는 백홍석(손현주)의 마지막 한 방은 이 투표율을 두드렸다. (만약, <나는 꼼수다>가 없었다면, <추적자>의 ‘24시’ 설정은 일반이 공감하기 힘든 정치공학적 논리였을 것이다.) 위선으로 가득한 서민의 정의를 내세운 강동윤과 같은 사람을 다시 한 번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만들 수 없다는 의지는 매우 비현실적인 투표율이자 거꾸로 하면 4.19와 일치하는 91.4%라는 투표율을 만들었다.

그렇게 <추적자>는 시청자의 한 손에다가 뜨거운 정의의 승리를 쥐어주면서 또 다른 한 손에서는 서 회장의 입을 빌려, “자기 이익을 위해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 게 백성들의 마음”이라며 뜨끔한 반성문을 건넸다. 이 정도 되면 현실을 넘어선 판타지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에 대한 평가는, 현실을 핍진력 있게 표현했다거나, 연기력이 훌륭했다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백홍석의 분투기와 작년 한 해 우리를 강타한 정치 담론이라는 차원이 다른 서사를 하나의 맥락으로 꿰어서 <나는 꼼수다>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나는 꼼수다>에서도 듣지 못한 판타지, 다시 말해 패배감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백홍석의 패거리의 인간성의 승리와 국민의 선택이란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도 아무것도 잃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승리는 없다는 현실적인 엔딩을 통해서 말이다.
드라마가 시작한 초반 많은 시청자들은 손현주에게서 <테이큰>의 리암 니슨의 역할을 기대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한 인간에게 닥친 불행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데 주력하기보다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어떤 것인지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추적자>는 본격 장르 드라마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앞으로 다가올 대선을 맞이해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 모두가 백홍석의 처지에 노이기 전에 한번 고민해보자고 말하는 계몽드라마에 가깝다.
<추적자>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단순히 현실을 잘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꼼수다>의 서사가 막혔던 현실의 한계를 넘어선 판타지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추적자>의 가장 놀라운 성취는 여기에 있다. 드라마라는 매체가 매우 직접적으로 우리 시대와 시청자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도 무려 대선, 당장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미션을 가지고 말이다. 즉, <추적자>는 총선 이후, 정치적 피로감에 지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릴 때라고 말해주는 이른바 성인우화인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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