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의 성공과 ‘나가수’의 실패, 검열의 역사

[엔터미디어=우석훈의 대중문화 파토스] 최근에 ‘무한도전’을 만드는 결정을 한 어느 MBC 간부를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무한도전’의 성공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그 분의 대답은, 현장 제작진에게 전폭적인 재량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무한도전’ 이전의 오락 프로는 사실상 포맷과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고, 그 틀 내에서 코미디든 예능이든 제작되었었다. 즉 이미 짜놓은 틀과 주어진 줄거리 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한국의 오락 프로였던 셈이다. 민주화의 진행과 함께, 그런 시나리오 없이도 충분히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다는 MBC 제작진의 의사가 반영되어, ‘무한도전’이라는 성공한 버라이어티 쇼가 생겨난 셈이라는 게 그 분의 설명이다. 무한도전 내에서는 무수히 많은 규칙들이 그 안에서 생겨나고, 또 자기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 아주 곤혹스런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일종의 ‘오픈 포맷’이라는 게 한국 오락프로에 생겨난 셈이다.

‘1박 2일’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룰이 그 안에서 생겨나고 수정되고, 또 지켜지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시청률을 위해서라지만, 21세기에 사람이 굶는다는 게 과연 인권적으로 옳은 것인가, 그런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안에서 룰이 제시되고, 거기에 대해서 합의하고 동의하는 과정들이 생략되었다면 정말 이 방송은 ‘반 인권 방송’이라고 몰릴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토론 과정이나 약속이 지켜지는 과정 자체가 오락의 한 요소가 되었다.

자, 이렇게 시작된 제작진의 재량권이 서바이벌 버라이어티로 포맷을 바꾼 ‘나가수’에서 다시 한 번 등장했다. 제작진은 충분한 재량권을 가질 수 있고, 자신들이 논의해서 규칙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사회적 합의 혹은 문화적 동의는 한국에서 이미 등장한 셈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풍이 거셌다. ‘나는 가수다’가 아니라 ‘나는 선배다’라는, 즉각적인 패로디는 시청자들의 심경 일부를 반영한 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규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예능 방송에서의 규칙이 무엇이냐,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하나 부딪힌다. ‘1박 2일’에서도 종종 규칙을 바꾸는데, 예를 들면, 그 대신 패자만이 아니라 팀 전체가 같이 굶는다, 이런 형식이다. 여기에 대해서 한 번도 원칙이나 규칙이라는 질문이 사회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나가수’에서만 문제가 되었을까?

이것은 아무래도 정의라고 하는, 지난 해부터 한국에서 ‘정의 신드롬’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흐름에서부터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간단히 말하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부터 시작된 사회적 흐름이 외교부의 어느 장관이 자기 딸을 특채로 뽑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 것과 연장선 위에 놓은 것이 아닐까? 예전에는 장관이 자기 딸 정도 공무원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은근슬쩍 자기 친척을 공직에 밀어 넣었다가는 고위 공직자도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으로 한국은 바뀌었다. 정말 한국의 시간은 빠르고도 빠르다.

책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20세기에 정의론이라는 논리 자체를 만들어낸 존 롤스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정의라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는 같은 흐름 내에 있는 학자이다. 롤스의 정의론의 내용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맥스 민’ 즉 약자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정의는 개인의 선택으로만 환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집단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지금의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약자? 우리는 이론을 몰라도 본능적으로 누가 약자인지 안다.

‘나가수’에서 문제가 된 것은, 그것이 서바이벌 포맷이라서 승자독식을 강화한다거나, 아니면 게임의 규칙을 바꾸었다는 그런 게 아니라, ‘선배’에 대해서 규칙이 관용을 배풀었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 변형된 규칙의 포용성이 후배였거나 신인이거나 혹은 어렵지만 우리가 같이 성공을 기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 방송을 둘러싼 사회적 양상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나가수’는 정의가 무너지는 순간, 즉 약자에게는 가혹하고도 좁은 게임의 규칙이 선배에게는 지나치게 관용적이며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물론 문화 산업 내에서 시장이 1/5 정도로 줄어든 가수들 자체가 약자이다. 그래서 큰 눈으로 보면, ‘나가수’라는 버라이어티 쇼는 그 자체로 약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 방송의 폐지에 기꺼이 찬성할 수 없다. 거시적으로는 약자에게 카메라를 비추는 의도가 있었으나, 미시적으로는 선배를 보호한다는, 참 양립시키기 어려운 딜레마에 선 것이다.



자,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과연 담당 PD를 교체하자는 경영진의 개입이 옳은 것이냐는 또 다른 질문 앞에 우리가 서 있다. ‘1박2일’의 성공이 제작진에게 주어진 재량권이라면, 한 번의 실수를 바로 제작진의 교체라는, 경영진의 직접적 개입이 과연 옳은 것인가? 맘 대로 만들어, 그렇지만 한 번에 내가 너를 자를 수 있어, 이것은 재량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바로 언론이나 방송에서 ‘검열’이라고 부르는 것이 작동 메커니즘의 대표적인 것 아닌가? 긴급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은, 바로 독재 시절의 오락 방송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가수’의 사소한 실패는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지만, ‘나가수’의 담당 PD 교체는 공분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군사 정권 시절의 방송 정책으로 회귀하는 제작진의 폭거인 셈이다.

좋은 버라이티쇼, 그리고 정의로운 버라이어티쇼를 우리는 계속보고 싶다. 담당 PD는 사과할 필요도 없고, 사죄할 필요도 없다. 방송 만들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생기게 마련이다. 다음 번 방송으로 그걸 만회하면 되거나, 아니면 그걸 계기로 더 재밌는 걸 만든면 된다. 담당 PD가 아니라 사장이 교체되는 게, 오히려 버라이어티 쇼를 위해서라도 더 좋은 결정일 것 같다.

차라리 사장이 그만두어라, 그게 ‘나가수’ 사건을 보면서 내가 느낀 이 사건의 가장 정의롭지 못한, 그리고 효율적이지도 못한 부분이다. 제작진의 재량권은 유지되어야 하고, 방송의 방향과 규칙에 관한 것은 시청자들이 결정할 일이다. ‘나가수’ 논쟁은 이제 2라운드로 가는 것 아닌가?


칼럼니스트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honortomeadows@entermedia.co.kr


[사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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