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스터리 대백과, 오가리 이남희 편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연극 제목 한번 참 길다. 띄어쓰기도 없이 모두 18자<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라니. <필로우맨>의 극중 작가 카투리안이 봤다면 최악의 제목이자 거의 미친 제목이라고 했을 법하다. 근데 직접 만나본 이 연극 미치도록(?) 흥미롭다.
주인공은 동남아시아 혼혈인 택시기사 ‘오가리’. 술에 취해 밤마다 바람난 엄마를 찾아다니는 아버지와의 기억으로 복수의 칼을 품고 살게 된 인물이다. 모두 13명의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모두 ‘오가리’가 낳은 새끼들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오가리의 망상과 분열된 자아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란 의미이다.
작품의 흥미로운 지점은 불륜을 용서와 관용으로 미화한 '처용가'의 미스터리를 처용 아비와 처용 아들의 버전으로 나눈 뒤 연극적 상상력으로 풀어냈다는 점. 처용의 아들로 볼 수 있는 오가리는 처용콤플렉스를 앓고 있는 인물. ‘용서하지 말라’고 외치는 ‘검은 처용’의 환청 속에서 체념과 용서 그리고 복수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적인 처용에 가깝다.
지난 12일 프레스 콜을 통해 공개된 국립극단 삼국유사 프로젝트 세 번째 연극 <나의처용>은 광적인 망상 속에서 몸부림치는 오가리의 비극을 현대적 처용으로 재해석해 우리 안의 어둠을 마주보게 했다. 망상과 현실, 망자의 세계와 산자의 세계가 거칠게 엉켜진 가운데, 노골적인 대사와 거침없는 욕설이 공연시간 내내 쏟아졌다.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고 밀고 당기는 이질적인 시선과 생채기를 내는 대사들은 관객을 다소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
이건 또 뭔가. “분노하라 영감이여! 분노하라 뽕삘이여! 이 더럽고 좆같은 세상을 증오의 노래로 모조리 불태워버려라!”라고 진짜 뽕삘나는 노래를 불러 재끼기도 한다. 현대극으로 풀어내고 있지만 전통의 처용무도 만나볼 수 있어 시공간을 훌쩍 건너뛰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배우 이남희의 연기 스펙트럼이다. 이남희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장난반 농담반으로 “연기 외 잘하는 건 술 먹기”라고 밝힌 바 있다. <나의처용>에선 그의 장기 2가지를 고스란히 맛볼 수 있다. 술과 약에 취한(?) 오가리의 악마성과 인간미를 동시에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면과 외면의 분열적 연기’라고만 지칭하기엔 너무 싱겁다.

그래서 준비했다. 이 글을 쓴 진짜 이유는 오가리 이남희가 왜 그렇게 망상에 사로잡혀, 12명의 분열된 자아를 낳게 됐는지 그의 전작을 통해 이야기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딱딱한 리뷰 글이 아닌 웃으면서 연극과 친해지자고 쓴 글이니 죽자고 덤비지는 않았으면 한다.
때는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친 키스>로 얼굴을 알린 이남희는 ‘장정’ 그 자체였다. 영화감독이 되고자 하지만 누추한 현실은 흥신소 직원 자리 밖에 내주지 않는다. ‘장정’은 복수의 화신으로 악마적이며 거친 매력의 소유자 ‘히드클리프’에 열광한다. 소설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히드클리프’ 말이다. 여기서부터 ‘오가리’의 복수심은 불타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랬던 그가 몇 년 뒤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채울 수 없는 모성결핍으로 광기어린 살육을 벌이는 비뚤어진 인간 연산(연극 이(爾)) 으로 돌아왔다. 2012년 ‘오가리’는 바람난 어머니를 살해한 뒤 자아분열과 망상에 시달린다. 살해의 순간 마약중독자이자 살인자인 남두자(유연수)와 여장 남자 하구니(김수현)와 극적으로 조우하게 됐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분석부터 하고자 해 아주 재수 없는 망상 속 인물이자 맛탱이 간 의사(이명행), 어미 살인과 맥을 같이 하는 빨간 구두 아가씨(박성연)도 등장한다. 떨쳐내려고 해도 떨쳐낼 수 없어 망상 친구들과 함께 살게 되지만 결국 망상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망상의 실체를 알고 싶었던 ‘오가리’는 정신분석학의 대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연극 방문자)로 변신한다. ‘인간이 신을 대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프로이트에게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미지의 방문자(김수현)가 나타나 평생 쌓아온 논리를 뒤 흔든다. 이때 만난 방문자는 카트를 밀고 다니며 ‘처용 전래동화’를 들려주는 ‘하구니’로 환생한다. 구원자의 이미지도 잠시 비쳐진다. 물론 자비와 구원은 뽕녀(장희정)의 주사바늘로 구체적으로 상징화된다.

취기로 반쯤 얼이 빠져 지내던 ‘오가리’의 과거를 좀 더 파헤쳐보자. ‘검은 처용’의 속삭임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오가리’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파우스트가 될 뻔 했던 사건(연극 뱃사람)도 있다. 몇 십 년 전 살인죄를 저지른 ‘샤키’가 당시 했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그의 영혼을 사겠다고 제안하는 악마가 나타난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오가리에게도 악마의 속삭임이 들린다. “가리야, 어쩌겠니, 용서해라”는 아비의 말을 가로막은 채 “가리야, 용서하지 마라”고.
파우스트 경험으론 충분하지 않았을까. 내친 김에 파우스트인 척 하는 악마 메피스토(연극 우어 파우스트)의 내면까지 들어갔다 나온다. 파우스트를 경매에 붙이며 악동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오가리’의 악동 기질은 시체녀(유소영)의 겨드랑이를 박박 닦아주는 장면에서 감지됐다. 또 다른 측면에선 죽은 어미의 죄를 이렇게라도 씻어내고자 하는 의미로도 비춰졌다.
쓰다 보니 천년의 시간을 지내온 처용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글이 아닌 ‘오가리 배우 이남희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글’이 되고 말았다. 이 배우의 구수한 파마머리, 중성적 보이스. 자유롭게 흐느적거리는 몸체 뒤에 숨겨져 있는 얼굴은 대체 몇 가지일까. 그 미스터리는 쉽게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나의처용>이 100분 내내 관객들을 열광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나게 잘 만들어진 연극이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어 뭔가를 각성하게 하는 게 연극 본연의 책무이고 트렌드라고는 하지만 감상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다만 배우 이남희 자체만으로 한번 쯤 볼만한 가치가 있다. 13일 프리뷰 공연을 시작으로 28일까지 국립극단 내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정다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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