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의>의 성패는 라이벌에 달렸다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80년대 최고의 액션스타였던 성룡, 그의 영화들이 더 이상 피를 끓게 하지 못하노라고 처음으로 탄식했던 때를 기억한다. 대략 90년대 중반으로, <홍번구>라든가 <썬더볼트> 등이 나왔던 무렵이다. 물론 이때의 작품들이 할리우드 박스오피스를 점령하면서 그는 진정한 월드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프로젝트A>나 <폴리스 스토리>의 열혈 성룡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90년대 중후반부의 작품들은, 비록 스케일이 커졌을지언정 왠지 모를 공허감만을 남겼다.
늙으면 기력이 쇠하는 게 당연한 일이고 그것은 천하의 성룡에게도 예외가 아닌 문제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성룡 영화들의 아쉬움은 단지 그 ‘예전만 못한 몸놀림’으로만 귀결되지 않는다. 핵심은 오히려 서사에 있었으니, 적들이 예전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명작으로 칭송받는 성룡의 액션영화들에는 대개 무지막지한 실력을 가진 ‘끝판대장’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주로 현란한 발재간을 자랑하며, 실력으로도 성룡이 맡은 주인공을 압도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잔챙이들과 실력이 상당한 중간보스들까지 때려눕히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물론 관객들마저 기진맥진해 있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극강의 존재. <쾌찬차>나 <프로젝트A> 같은 작품에서는 성룡, 홍금보, 원표 3인이 모두 붙어도 그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으니, 많은 경우 편법을 통해서야 천신만고의 승리를 간신히 챙길 수 있었다.
기억하건대 그러한 ‘끝판대장’이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이 <취권2>였다. 그리고 이후로 성룡의 액션영화는 예전만한 흥분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명색이 드라마 칼럼인 지면의 서두부터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 성룡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큰 힘에는 큰 라이벌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감히 대적할 자가 없는 주인공이 선사하는 쾌감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불균형이 지극히 심화된다면 영화 <테이큰 2>처럼 악당들이 등장하자마자 측은해지는 사태가 발생하고야 마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병훈 PD의 새 드라마 <마의>를 보면서 문득 성룡을 떠올린 것은, 그의 사극 주인공들이 대개 대적할 상대가 없는 재능의 소유자, 즉 먼치킨에 해당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병훈표 사극들이 그간 높은 인기를 구가해 온 것은 영웅의 성장담과,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적대자들을 다루는 원천기술이 있었던 까닭이다.
먼저, 주인공들의 능력이 탁월한 대신 그 상당수가 신분상의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원래는 양반이었으나 하층계급으로 전락한 <대장금>의 장금(이영애)과 <마의>의 백광현(조승우)은 물론이요, 심지어 장차 왕이 될 <서동요>의 장(조현재) 또한 오랜 기간 태학사의 기술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로는 경합 등의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점층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다음 단계의 기대감을 낳았다는 것. 그리고 셋째로는 매력적인 적대자들을 꼽을 수 있겠다. 그들은 타고난 천재인 주인공에 비해 노력형 수재들이며, 그 콤플렉스가 때론 인간적이며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헌데 최근작으로 올수록 둘째, 셋째의 원천기술들을 점차 이병훈의 사극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구조가 최상의 위력을 발휘한 작품은 최고시청률 63.7%의 기록을 수립한 <허준(1999)>였다. 이 작품에는 초창기 임오근(임현식)부터, 유도지(김병세)를 거쳐 어의 양예수(故 조경환)까지 단계별로 적대자들이 다채롭게 등장했으며, 승부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 적대자들은 모두 허준(전광렬)의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틀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대장금>부터였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이 작품의 전반부에는 금영(홍리나)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라이벌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수차례 치러진 경합들 또한 수라간 나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 바 있다. 하지만 의녀 생활이 시작되는 후반부부터는 라이벌이 사라진다. 남는 것은 오로지 적들 뿐. 그들은 주인공이 가진 재능의 영역에서 싸우기 보다는 그 바깥에서 암투만을 생산해낸다.

이러한 경향은 <이산>과 <동이>에까지 이어지는데, <대장금>의 수라간 역할을 해줬어야 할 도화서(<이산>)나 장악원(<동이>)이 암투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음은 물론, 확연한 라이벌도 등장하지 않는다. 동이(한효주)에게는 장희빈(이소연) 정도나 있었을까. 하지만 초반부 좋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뻔했던 그녀도 중반 이후부터는 암투 제조기로 돌변하고 말았다.
우려는 결국 <마의>에도 이어진다. 총 6부가 방영된 현재까지만 봐도, 백광현이라는 인물에게 출중한 재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공식 홈페이지의 등장인물 소개란을 아무리 봐도 그에게 대적할 만한 라이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확실해 보인다. 오로지 이명환(손창민)만이 백광현의 반대편에 있을 뿐. 하지만 그는 그야말로 ‘끝판대장’에나 어울리는 인물이다. 이 드라마의 첫 장면이 이명환의 몰락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는 벌써부터 백광현을 상대하고 있을 급수가 아닌 것이다. 헌데 지난 6회에, 광현이 성인으로 성장하자마자 청나라에 바칠 명마를 치료하는 것을 놓고 둘이 맞상대하고 있으니 우려가 들 수밖에 없는 노릇.
<동이>가 방영되던 무렵, 주말께에 무심코 재방송을 틀어놓았다가 매회 어김없이 “큰일 났습니다.”라는 대사를 듣게 되는 신비체험을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한 회가 멀다하고 각종 암투에서 빚어진 ‘큰일’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아마 곧 명환도 백광현이라는 문제의 이름자를 듣게 될 터. 의술 실력과 막강한 권력이라는 떡을 양손에 든 그가 취할 행보는 과연 어느 쪽일까? 모쪼록 <마의>에서마저 “큰일 났습니다.”라는 대사를 매회 듣는 일만큼은 없으면 좋으련만.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MBC, <프로젝트A>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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