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공 속에 묻어야만 하는 슬픈 옛이야기 '리어왕'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스쳐버린 그 날들 잊어야 할 그 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유기노인수용소에서 생활하는 기저귀 찬 늙은 리어는 조용필의 ‘허공’을 가슴절절하게 부른다. 작가이자 연출가 고선웅이 말하고자 하는 ‘부자유친’과 ‘가화만사성’이 이 장면에서 확실하게 드러났다.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광야에서 방황하는 아버지 ‘리어왕’은 이젠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란 의미이다.

LG아트센터 무대 위에 오른 <리어외전>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셰익스피어 비극을 비틀어 오락비극으로 풀어낸 결과 호불호가 갈린다. 1막부터 통속극 색채가 강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딴지 걸기 같은 고선웅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의 입장에선 ‘장난이 지나친 건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2막은 희희낙락 장난을 치면서도 리어왕의 본질적 운명을 제대로 살려냈다. 관객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고선웅은 관객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왔다.

고선웅의 <리어 외전>은 원작 <리어 왕>의 캐릭터를 다소 변용시키거나 추가했다. 작가의 말대로 '짝퉁' 리어왕이다. 리어 왕(이승철)은 좀 더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로 나온다. 왕위와 재산을 탐하는 자식들 때문에 유기노인 수용소에 버려진 뒤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인물. 마지막엔 발레 춤을 추며 생의 의미를 통달하는 아버지다. 결국 자신의 눈먼 판단력으로 세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로 결심하기까지 한다.

셋째 딸 코딜리어(이경미)에 대한 캐릭터 해석이 흥미롭다. 원작의 코딜리어는 말을 아껴 아버지의 분노를 산다. 하지만 2012년 코딜리어는 "언니들보다 사랑해요" 이 아홉글자 정답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입 바른 소리를 읊어댄다. 도리어 자기주장이 강해서 미움을 사는 꼴이다. 그런데 이 캐릭터, 미워할 수 없다. 리어왕이 비극을 맞게 되는 이유에 강력한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몰입과 놀이를 절묘하게 비벼놓은 고선웅식 연출기법은 이번에도 맛깔스러웠다. 진지한 장면에서 배우들은 트로트를 부르거나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할만한 장면에선 '어버이 은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등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식이다. 상가집에 와서 신나는 트로트를 부르는 손님들이랄까. 분명 생경하다. 하지만 연극적 놀이 안에서 배우들은 온 몸으로 놀았고, 그걸 보는 관객들의 귀와 눈은 즐거웠다.

현실을 은유한 무대위 무대엔 총 21명이 앉아있다. 주목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눈 앞에 들어오는 코러스들의 역할 쟁탈전, 춘화를 즐겨보다 결국 두 눈이 뽑히는 글로스터(유병훈), 우유부단한 남편에서 티베트의 성자로 변신신했지만 미지근한 연못처럼 썩어있는 올바니(이명행), 잘생긴 사생아 에드먼드(호산), 희망도 절망도 없는 치킨하우스의 대장 왕고(안상완)등 인생의 축소판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인간들이 포진해있다. 그들은 '툭툭' 뭔가를 던져줬다.

언뜻보면 옆길로 새는 듯한 연극은 제 노선을 요령껏 지키고 있다. 원작의 광대대신 코러스장(선종남)이 무대를 뚫고 등장해 '인생에 두번이 있어'라는 재치있는 논평을 가한다. 게다가 눈알이 뽑힌 아비 글로스터를 연상할 수 있게 치킨하우스에는 인형 눈을 붙이는 노인들이 많다.



마지막은 연극 무대 판을 완전 갈아 엎는다. 리어왕이 야기한 비극을 품고있는 '리어카의 시대는 간 것이다.' 무대가 완전히 위로 들리면 리어카에 탄 두 자매가 그 밑을 들어간다. 비극을 야기한 그들이 사라진 그 공간 뒤에는 새로운 문이 있다. 누군가 나온다. 또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겠지만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가 재현되진 않았음 하고 바라게 된다.

<리어외전>에선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로 시작되는 설운도의 노래 ‘나침반’도 들을 수 있다. 관객은 이렇게 답할 듯 하다. ‘차라리 강남으로 오세요’라고. 28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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