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현 작가는 왜 양 극단을 위태롭게 오갈까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개인적으로 수수께끼라 생각하는 것 몇 개가 있다. 물론 텔레비전 드라마 관련이다. 예를 들어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를 보면 이야기의 맥락과 하등 관계없는 일상적인 대사나 상황들이 불쑥 끼어들 때가 있다. 이런 장면을 만나면 대략 정신이 멍해져서, 그렇게 쓰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다만 인터뷰를 도통 하지 않는 작가인데다 그 궁금증이라는 것도 대단한 수준이 아니라 이 정도는 그냥 소소한 수수께끼로만 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계에서 문호(文豪)라는 경칭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작가인 김수현에 관한 내용은 사정이 좀 다르다. 그녀 또한 인터뷰는 절대 사절이라 아마도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얻기 어려울 것이나 이 수수께끼에는 작가의 세계관과 관련한 중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그 내용인즉슨, 어째서 연속극과 미니시리즈에서 그녀의 가족관은 정반대에 가까우냐는 것이다.

2000년도에 방영된 <불꽃>이라는 미니시리즈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김수현 극본, 정을영 연출로 어느덧 13년 전 작품이다 보니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다들 이 드라마의 전개라든가 캐릭터들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하다. 헌데 어떤 장면만큼은 모두 손뼉을 치며 정확하게 떠올려낸다.

애정 없는 결혼생활에 서슬 퍼런 시어머니 강부자의 등쌀까지 더하여 하루하루 메말라가던 주인공 이영애가 친구 장서희에게 전화로 신세한탄을 하는 장면인데, 울먹이며 전화통에 매달려있던 그때 그야말로 느닷없이! 시어머니가 나타난다. 나를 포함하여 당시 드라마를 보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장면에서 뒤로 자빠질 듯 기겁했다(고 증언했다). 말하자면 <불꽃>에서 묘사된 시댁의 풍경이란 거의 호러 수준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례. 2003년 추석 특집극으로 방영된 드라마 <혼수>를 보자. 역시 김수현 극본에 정을영 연출이다. 한국에서 결혼 전에 거쳐야 하는 숱한 갈등들을 풀어낸 드라마로, <불꽃>에 강부자가 있었다면 여기에는 예비 시어머니 김용림이 있다. 명절 특집극이니 모쪼록 결말은 훈훈해야 할 텐데 그 예비 시어머니의 과욕은 모든 걸 망치고 만다. 그리하여 결혼이고 뭐고 홀로 짐 싸서 어딘가로 떠나는 아들 김정현의 뒷모습이, 이 충격적인 특집극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았다.



이것은 돌출적인 사례들이 아니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들 중 멜로드라마로 분류되는 미니시리즈들에서 시댁(또는 예비 시댁) 상당수는 여자 주인공과 적대적인 위치에 있다. 대개 부잣집이고 부모 중 누군가는 독선적이고 아집이 강하다. 그에 반해 여자의 가족들은 불완전하거나 가난하거나 무력하다(<청춘의 덫>, <불꽃>, <천일의 약속>…). 요컨대 김수현 작가의 멜로드라마에서 가족이란, 쉬이 허락되지 않는 사랑을 관철시키려는 여주인공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헌데 주말연속극 - 홈드라마로 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한 것은 더더욱 아닌 중산층 3대 이상의 대가족은, 김수현 홈드라마의 오랜 이상향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야기의 화자 혹은 무게중심은 시어머니 혹은 예비 시어머니가 될 집안의 맏며느리다. 같은 작가의 멜로드라마 미니시리즈와는 대척점에 있는 구성, 이 괴리가 바로 수수께끼라는 얘기다.

멜로드라마와 홈드라마는 장르가 다르고, 장르마다 법칙 또한 다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가의 세계관이란 아무리 다른 소재의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경향이 강한 데다, 김수현의 홈드라마는 두 극단의 사이에서 어떤 타협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엄마가 뿔났다>의 김한자 여사(김혜자)는 이 장르에서 드물게 주부 파업을 선언했고, <무자식 상팔자>의 맏손녀인 안소영(엄지원)은 미혼모가 되어 다시 가족으로 돌아왔다. 허나 우리는 이 파격이 할아버지 이순재의 결단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록 매사 독선적이었던 대발이 아버지 시절(<사랑이 뭐길래>)에 비하면 그 포용력의 변화도 괄목할 만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이 세계의 구심점이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불변이며 다른 홈드라마들과 비교해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들이 끝까지 놓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오히려 주목할 부분은 김수현 작가의 멜로드라마 캐릭터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 안소영이 미혼모로서 홀로서기를 포기하고 가족에게 백기투항했다는 점일 게다.)

말하자면 기껏해야 가계 권력의 정점인 가부장이 폭군에서 비교적 온화한 왕으로 바뀐 정도라는 건데(어쨌든 왕은 왕이라는 거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분가하고 미국으로 떠나려던 귀남(유준상), 윤희(김남주) 부부를 붙잡을 구실이라곤 그저 꼼수밖에 없었던 시할머니 강부자와 시어머니 윤여정을 떠올려보면 김수현 표 주말연속극의 경직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말이 이상향이라고 해서 많은 수의 가족구성원으로 득시글거리는 이 세계가 매일매일 행복으로만 가득 차 있다는 뜻은 아니다.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원치 않게 부대껴야만 하는 일상의 디테일은 지긋지긋하리만치 살아있다. 그렇기에 더 갸웃하게 된다. 왜 작가 김수현은 도망치고 싶은 가족과 판타지의 가족,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인 디테일과 구시대적 가족체계라는 양 극단을 위태롭게 오가야만 하는 걸까? 모든 게 오리무중인 가운데 50줄을 넘긴 안 씨 집안의 세 아들은 아버지 문안인사 출근 도장을 못 찍었다며 오늘도 전전긍긍이다.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JTBC, 김수현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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