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시선으로 <광해>를 봐서는 안 되는 이유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면,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연극이나 뮤지컬이 개막했다고 하면 영화와 똑같은 잣대를 들이밀며 평가를 한다.
스펙터클하고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편하게 보고 싶다면 영화를 보면 된다. 그보다는 보다 자유스런 시선으로 인물의 심리,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보고 싶다면 연극을 보면 된다. 지난 23일 개막한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는 영화의 후광을 등에 업은 작품이 아니라 제작 초기부터 동시에 기획을 시작한 작품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와 비교하며 극과 극의 반응을 보였다.
연극 <광해>를 2회 연달아 관람했다. 결론은 상당히 흥미로웠다는 점. 영화가 대중 영화 느낌이 강했다면, 연극은 보다 주제의식 있는 연극에 가까웠다.
<광해>는 조선 광해군 8년, 독살 위기에 놓인 ‘광해’를 대신하여 왕 노릇을 하게 된 천민 ‘하선’이 왕의 대역을 맡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실제 실록에서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광해군의 15일 간의 행적을 조명하는 데 있어 그의 대리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는 참신한 설정을 가미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한다.
사사건건 하선과 충돌하지만 하선을 교육시켜 광해의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도승지 허균(박호산 김대종), 하선의 눈빛만으로도 모든 걸 알아채며 보필하는 조내관(손종학 김왕근), 옳은 일을 할 뿐이라고 묵묵히 말하는 도부장(강홍석), 하선과 끈끈한 인간애를 나눈 사월이(김진아) 등은 조선이 필요로 했던 진정한 군주 ‘하선’의 모습에 동화되게 된다.
영화의 코믹함 그대로 전반전은 상당히 코믹하다. 하지만 중반 이후를 넘어가면서 영화와는 다른 뭔가가 있었다. 관객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광해의 그늘에서 비리를 저지르는 무리들과 15일간의 새로운 왕 ‘하선’에 가슴을 열어주는 무리들로 나뉜 점. 특히 이조판서 박충서(황만익)가 ‘하선’의 무리들과 대결을 벌이며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관객들을 집중시키는 인물들의 심리 변화도 디테일하다. 하선과 유정호의 대화, 하선과 중전의 대화, 허균과 하선의 대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감지할 수 있는 ‘되돌릴 수 없는 (왕)의 과거’, ‘변치 않게 지켜주고 싶었다’, ‘과거의 나와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등 이 시대가 진짜로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화두가 그러했다.
긴장의 끈은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광해의 마지막 속마음 표출로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의 신하가 아니오’라고 연을 끊는 지도자, ‘정치가 뭔데 백성보다 미뤄’라고 외치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지도자. 이에 대한 생각은 오로지 관객 몫이다.
넓디 넓은 궁을 연극 무대로 끌고 올 수는 없는 법. <광해>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용상 틀을 무대 전면에 배치한 뒤 조명과 효과음으로 무대를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무엇보다 긴장감 가득한 타악소리(에스닉팝 그룹 프로젝트 락 이충우)가 영화 카메라 앵글의 줌 업 기능을 톡톡히 하며 관객들의 심장을 조였다 늘렸다 한 점이 이 작품의 쾌거다.

극중 하선 사물놀이패의 연주와 해학 그리고 풍자는 극 전체의 메시지와 맥을 함께하며 관객을 웃게 만들었다. 물론 공중에 바로 흩어지는 웃음이 아니다. 웃은 뒤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웃음이다.
더블 캐스팅 된 주인공 배수빈과 김도현의 연기 열전이 볼만하다. 배수빈은 무엇보다 무대를 즐기고 있었다는 점이 관객의 박수를 받게 했다. 어깨의 무게를 뺀 하선의 등장이 이리 반가울 수가 있을까. 김도현은 광해와 하선 그 사이 겹겹의 얼굴을 변화무쌍하게 불러냈다. 중전과의 로맨스에서 감지할 수 있는 귀여움까지 천상 배우였다. 배우 황만익의 무대 장악력은 단연 으뜸이다. 뮤지컬이 아닌 연극 무대에서도 자주 자주 만날 수 있으면 한다. 사월이 역 배우 김진아는 궁중 암투의 무게감 속에서 만날 수 있었던 한 줄기 아름다운 빛이었다. 4월21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볼 수 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주) 더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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