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영화 콤플렉스, 너무 지겹지 아니한가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최근 착한 영화들을 두 편 보았다. <미나 문방구>와 <뜨거운 안녕>. 그런데 내가 막 별다른 생각없이 쓴 표현인 '착한 영화'란 무엇인가? 이게 과연 좋은 의미인가?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말을 쓰면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앞에서 쓴 '착한 영화'란 심하게 나쁜 사람들이 나오지 않고 내용도 안전하며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전체관람가 영화라는 뜻이었다. 하긴 전체관람가 영화들이 다 그렇다. 그렇다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착한 영화'라는 말 대신 그냥 '전체관람가 영화'라는 말을 쓰는 게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 표현에 보편성이 떨어진다면 그냥 '가족영화'라고 하는 방법도 있다.

두 영화는 '좋은 영화'였는가? 글쎄. 둘 다 지극히 평범한 영화였다. 착한 사람들이 나와 착한 사람들만이 하는 고민을 열심히 하다가 긍정적인 결말을 맞는.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까칠하게 시작하지만, 끝날 무렵에는 주변 환경과 스토리의 영향 속에서 그 까칠한 성격을 벗어던진다.

이건 좋은 일이다. 적어도 주인공에게는. 개인적으로 세상이 성격 나쁜 사람들을 모범생으로 개조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두 영화 모두 나쁘지 않은 삶의 대안을 제시해 준다. 나는 여전히 <미나 문방구>의 주인공 강미나의 미래가 수상쩍기 그지 없지만, 적어도 갑자기 호스피스 그룹의 밴드를 떠맡게 된 <뜨거운 안녕>의 아이돌 주인공 충의는 영화가 끝난 뒤로 더 생산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이상한 영화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모든 인생을 호스피스 밴드에 투자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하지만 정말 그러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과연 이들이 좋은 이야기일까? 건전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건전한'은 시작부터 어느 정도 냉소를 품을 수밖에 없는 뻑뻑하고 인위적인 단어이다. 오로지 '건전하기만' 하다면 이야기는 더욱 뻑뻑해진다. 삶은 결코 건전한 것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품으려면 어쩔 수 없이 건전치 않은 것들까지 다루어야 한다.



두 영화가 의도 이상으로 갑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나 문방구>를 보자. 여기엔 문방구에서 늘 물건을 훔치고 아이들을 때리는 왕따 소녀가 등장한다. 이런 아이의 고통스러운 삶을 만져주는 것은 분명 가치있는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도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건 3,40대 관객들의 어린 시절 향수를 건드린다는 영화의 달짝지근한 목적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감당할 수 없는 어두움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니 심지어 초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도 검열의 대상이 되고, 별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모두가 착해지고 모두가 화목한 결말을 맞는다. 진지하게 제기된 문제와 현실 모두가 실종된 것이다. 과연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힐링'이 된 관객들이 얼마나 될까.

'착한 영화', '착한 드라마'만큼이나 한국에서 이상하게 쓰이는 표현이 '막장 드라마'다. 대부분 이 표현은 시청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자극적이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총 동원하는 드라마들을 가리키며 사실 그렇게 이상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어의 신조어들이 그렇듯, 이 단어는 굳이 담지 않아도 될 의미까지 먹어삼키며 고정관념을 만들어낸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괴상해진다. 일단 학교에서 배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보라. 이들 중 과연 '막장'이 아닌 드라마가 있던가? 그리스 비극은 어떤가. 성서는 어떤가. 단테의 <신곡>은 어떤가. 실제로 19세기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와 성서 모두를 검열하려는 심각한 시도가 있었다.

이야기의 억지스러움과 인공성을 따진다고 해도 요새 텔레비전 드라마는 결코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디워> 이후 모두가 아는 단어가 된 '데우스 에스 마키나'는 그리스 비극에서는 연속극의 기억상실증이나 골수이식만큼 당연한 해결책이었다. <햄릿>은 당시 유행했던 복수극의 클리셰들이 총망라된 작품으로 이런 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 심지어 종종 일관성을 잃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막장 드라마'와 '막장'스러운 소재를 다룬 진지한 드라마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긴 <도가니>를 막장스러운 영화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독하게 막장스러운 현실을 진지하게 그린 영화다. 하지만 <도가니>는 비교적 구분이 쉬운 작품이다. 드라마로 넘어가면 시청자들은 쉽게 자동적인 판단을 내린다.

요새 <개그 콘서트>에서 하는 ‘시청률의 제왕’을 보다보면 그렇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처음에 시작하는 '착한 드라마'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점점 '막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꼭지인데, 솔직히 처음 시작하는 '착한 드라마'처럼 가치없는 드라마는 없다. 한 무리의 착한 사람들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을 구경하는 건 지겹다.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한 무리의 착한 사람들이 있다' 이상의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건 심지어 착한 이야기도 아니다. 적어도 그 뒤에 이어지는 '막장물'은 관객들을 웃기기라도 한다.

다시 앞의 영화들로 돌아가면... 글쎄, 나에게 <미나 문방구>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미나가 문방구에서 힐링하고, 힐링받는 부분이 아니라, 문방구로 내려가기 전에 짜증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치여 폭발하는 장면이었다. 이는 결코 착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억지로 성질을 죽이면서 사는 대도시 직업 여성의 감정을 확실하게 대변해준다. 차라리 강미나가 그냥 남아서 자신의 성질을 마저 터트렸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마저도 든다. 그랬다면 문방구에서 힐링 주고 받을 때만큼 '착한 영화'는 못 되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착하게만 살아서 뭣하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미나 문방구>, <뜨거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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