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던 날’이 전하는 셀프 구원의 메시지와 돌봄의 에너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내가 죽던 날>은 미스터리 수사극의 외양을 띄며, 반전을 갖는다. 하지만 일반적인 수사극에 비해 서사의 진행이 느리고 직선적이지 않다. 반전 역시 제목이나 이정은의 캐스팅을 통해 어느 정도 암시되며, 반전을 통해 장르적인 쾌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수사극의 재미를 추구하는 관객이라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가치는 따로 있다. <내가 죽던 날>이 반전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여성연대와 셀프 구원의 메시지이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의 호연에 힘입어 영화의 정서를 끝까지 따라간 관객은 마지막에 먹먹한 감동을 누릴 수 있다.

◆ 두 개의 이야기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실종된 소녀를 탐문하는 형사를 그린다. 두 개의 이야기가 맞물려 있다. 하나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으로 섬의 외딴집에서 6개월간 지내다 사라진 세진(노정의)의 이야기이다. 강력한 태풍으로 시신을 찾지 못했을 뿐, 유서와 신발 등 자살로 추정할 근거가 많다. 또 하나는 사건을 탐문하는 현수(김혜수)의 이야기다. 그는 남편의 외도, 교통사고, 마비 증상 등으로 한동안 휴직 중이다. 정식 복귀를 앞두고 사건을 떠맡은 현수는 자살추정으로 간단히 종결하면 될 것 같은 사건을 열심히 파고든다. 세진이 머물던 섬에 가보고, 세진과 관계된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본다.

어쩌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잘 섞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 두 사람의 사연은 유사점이나 연결고리가 별로 없다. 현수가 왜 어느 지점에서 세진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관객이라면, 두 이야기가 따로 돈다고 느낄 것이다. 중반부는 지루하고 후반부는 느닷없다고 불평할지도 모른다. 사실 두 개의 이야기는 감정의 차원에서 느슨하게 중첩되어 있다. 우울증자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공감하는 관객이라면, 영화의 서사와 묘사가 꽤 절절하게 와닿는다.

현수가 세진에게 몰입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고립감에 대한 공감이다. 영화는 앞부분에 절벽 위에 서 있는 세진의 모습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현수의 모습을 짧게 비춘다.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자문하는 현수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던 일상에서 떨어져 나온 단절감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사회적 고립과 매장의 상태에 놓여있다. 세진은 아버지와 오빠의 범죄로 인해, 현수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즉 남자의 잘못으로 인해 일상을 도둑맞은 여자들이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자신의 삶이 꽤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곤 하루아침에 가까운 가족을 잃고, 평판을 잃고, 고립무원의 나락에 떨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밖을 향한 분노가 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안을 향한 우울로 침잠해 들어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곰곰이 생각하며, 내상을 키우게 된다. 이런 생각을 멈출 수 없는 현수는 세진에게서 자신의 우울과 고립을 본다. 감시하는 CCTV를 향해 욕을 해대지만, 그것은 방향을 잃은 채 흩어지는 분노다. 현수는 세진이 팔을 다쳤다는 말에서 직감적으로 자해를 떠올린다. 세진의 주변인들을 찾아다니던 현수는 가까웠던 사람들조차 세진의 죽음을 빠르게 받아들이거나 처리해야 할 사건으로만 사고하는 것에 비애감을 느낀다.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 사라지기. 이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자 한편으로는 가장 이끌리는 종말이다. 현수는 실종된 세진을 탐문할수록 우울의 심연으로 빠져든다.

◆ 가장 소외된 이웃과 나누는 돌봄의 연대

세진의 상황은 어쩌면 영화 <도희야>의 도희를 떠올리게 한다. 고통받는 소녀의 구원과 여성연대라는 키워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희야>와 비교하면, 더 섬세하고 진전된 면이 있다. 도희가 물리적 폭력의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과 달리, 세진은 고립과 외로움 등 심리적인 고통에 놓여있다. 세진을 학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괴롭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야말로, 대다수의 우울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이다.

또한 도희는 선망하던 엘리트 여성을 지렛대 삼아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세진은 돌봄을 실천하는 장애 여성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이는 잘난 여성만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외되어 보이는 이웃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으며 여성연대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해준다. <도희야>에서 구원자와 스펙이 같은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 여성현수는 이들 연대의 관찰자이며, 이들의 연대에 힘입어 오히려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내가 죽던 날>은 세진에 대해서든 현수에 대해서든 확실한 설명을 하지 않고 빈틈을 남겨둔다. 세진은 가사도우미의 전언 속에선 좀 더 영악해 보이고, 담당 형사와의 애정적인 관계에서는 조숙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이런 상상을 그냥 열어두는 편이다. 세진에 대한진술은 엇갈리게 느껴질 수 있지만, 세진의 입장에서 보면외로움과 고립감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검찰, 경찰 등 다른 많은 이들은 전자의 시각으로 세진을 보았지만, 현수는 세진을 후자의 시각으로 본다. 그의 외로움에 감응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영화는 현수의 상태에 대해서도 말을 아낀다. 그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은 앞부분의 변호사의 말이나, 뒷부분의 친구의 말을 통해 뒷받침되지만, 영화는 현수의 상태를 모호하게 처리한다. 행간을 메우는 것은 김혜수의 연기이다. 현수는 안간힘을 다해 일에 매달리지만, 수시로 공허해지는데, 이런 현수의 감정 상태를 김혜수의 풍부한 표정으로 적확하게 표현한다. 현수의 주관적 상태가 가장 구체적으로 기술되는 대목은 친구에게 자신의 자해와 악몽에 대해 말할 때이다. 그는 자해나 자살이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자살자의 심리와 셀프 구원의 메시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살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아무도 화답하지 않아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이런 인식은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임세원 저)<우리는 자살을 모른다>(임민경 저) 등의 책에서도 공히 발견되는 내용이다. 자살은 죽고 싶은 사람의 선택이 아니다. 살고 싶지만, 절망에서 벗어날 돌파구가 보이지 않기에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불안, 우울, 분노, 좌절된 소속감, 짐이 된다는 느낌 등 심리적 고통이 극심해질 때, 여기에서 벗어나려 무엇인가에 몰입하려 노력한다. 몰입을 통해 고통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려 하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죽음을 떠올리고 시도하게 된다. 죽음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보내는 구조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진의 자살시도를 구조요청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죽음 충동에 내몰려본 적이 있던 그는 네가 남았다. 아무도 너를 구해주지 않아. 네가 너를 구해야지. 인생이 네 생각보다 길어.”라고 절절한 목소리로 전한다. 셀프 구원의 메시지와 돌봄의 에너지는 새로운 삶을 선사한다. 자해의 흉터 위에 타투를 새기는 용기는 고통의 상흔을 딛고 새로 사는 삶을 상징한다. 2030 여성들의 자살률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지금, 자살방지 영화로 추천할만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내가 죽던 날’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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