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 탈연애시대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로맨스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TV삼분지계]를 통해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조상신이 보우하셨다. 남자의 인적사항만 간단하게 입력하면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돈 씀씀이는 어떻고 인간관계는 어떤지, 내가 모르는 단톡방에선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다 알려주는 AI가 존재한다. 사방팔방에 쓰레기 같은 남자들이 널려 있는 인간불신의 시대에, 이 영리한 AI만 있으면 횡액을 피할 수 있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원래 만들려던 AI는 이게 아니라는 것이고, 둘은 이 AI가 쏟아내는 정보다 죄다 사용자 동의를 구하지 않은 불법 데이터 마이닝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도덕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없애는 게 맞는 AI인데, 어쩐지 자꾸 사용하고 싶어진다. 이 흉흉한 세상에, 내 손 안에 들어온 흥신소가 있다니 사실 좀 든든하지 않은가.

MBC every1 화요드라마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남자의 됨됨이를 알려주는 AI’라는 소재를 이용해 초연결시대의 로맨스를 펼쳐 나간다.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는 이 작품을 어떻게 봤을까? 정석희 평론가는 데이터가 인생을 지배하는 시대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는 걸 전제하면서도, 모처럼 AI가 이상한 캐릭터를 다 걸러내 준 덕분에 바른 길을 걷는 인물만 보는 안도감이 있다고 평했다. 김선영 평론가는 로맨스의 신화가 그 유효기간을 다하고 진상남자들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탈연애시대에, 그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온 이성애 관계의 불안을 응시하는 영리함이 빛나는 작품이라 호평했다. 이승한 평론가는 주인공 서지성(송하윤)AI ‘장고의 버그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대목이 도발적이라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 바른 인물을 볼 때 느끼는 안도감

1989년 작 영화 <백 투더 퓨처2>의 배경은 2015년이다. 영화 속에서 펼쳐졌던 상상의 나래, 그 중 이미 현실화 된 것들이 있다. 심지어 일상이 되었다. 영상통화, 음성인식 TV, 무인식당 등, 그리고 아직 대중화되지는 않았으나 공중부양 보드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에 등장하는 사람이 맛이 갔는지 아닌지 알려주는 냉장고 장고도 머지않은 미래에 만나게 될까? 충분히 가능하지 싶다. 미래학자들이 데이터가 권력인 세상이 오리라고 예측했고 이미 데이터가 내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장고는 데이터를 조합해 답을 내놓는다. 따라서 감정에 의한 판단 오류 따위는 있을 리 없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 포스터에 네 사람이 나온다. 우연히 장고를 개발한 서지성(송하윤), 방역 회사 직원 문예슬(윤보미), 유기농 카페 사장 탁기현(공민정), 소방관 정국희(이준영), 이 넷이 중심인물이라는 얘기다. 앞의 셋은 절친 사이이고 서지성과 반대 성향인, 아날로그적 삶을 지향하는 정국희 사이에 로맨스가 싹튼다는 설정인 모양이다. 최근 SBS <펜트 하우스>를 필두로 해괴망측한 인물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이 하도 많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이처럼 바른 길을 걷는 인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다행히 지성의 어머니(황영희)에게 고백한 연하남 서점 주인도 장고진단 결과 좋은 사람이었고. 예슬의 마음을 흔든 치과 의사 한유진(주우재)도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 포스터에 나오진 않지만 내 맘 속 주인공 장고’, 그의 앞날이 궁금하다.

정석희 TV 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탈연애시대의 로맨스가 살아남는 법

21세기 탈낭만 시대의 로맨스 장르는 근본적으로 어드벤처물에 가깝다. 주인공들은 더는 과거처럼 가만히 앉아서 백마를 기다리지 않고 왕자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개구리와 키스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예컨대, 어느덧 이 시대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섹스 앤 더 시티>는 주인공들의 운명적 짝찾기보다 진상 개구리들퇴치기가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그리고 지금은 여성들이 탈낭만도 아닌 탈연애를 부르짖는 시대다. 이제 로맨스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는 이 위기의 시절을 돌파하는 로맨스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개구리쓰레기로 더 퇴보했고, 여성들은 조상신의 힘을 빌어서야 겨우 인간다운 인간을 감별해낼 수 있다. 주인공 서지성(송하윤)이 개발한 AI 냉장고는 성범죄자 약혼자로부터 지성을 구해내더니, 또 다른 막장직장 동료까지 응징해준다. 이 와중에 존중과 배려가 몸에 밴 천연기념물 같은 남자 정국희(이준영)가 나타나지만, 지성은 AI 냉장고마저 분석하지 못하는 그에게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요컨대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는 그동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왔던 이성애 관계의 불안을 응시하는 꽤 영리한 로맨스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herland@naver.com

◆ “‘착한 도감청’은 괜찮은 걸까”라는 도발적인 질문

냉장고 속 음식이 상했는지 아닌지 감별해주는 AI를 개발하려다가 얼떨결에 남자가 상했는지 아닌지 감별해주는 AI ‘장고를 만들어 버린 펠리컨전자 유비쿼터스 혁신개발팀 서지성 과장 대행(송하윤), 그 덕분에 남자친구의 성범죄를 알아내고 적시에 결혼을 피했으며, 없는 뒷소문이나 만들어 퍼뜨리는 입사 동기도 응징할 수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다가도, 기분이 영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다. 온라인에서 지성이 파혼을 결정하게 된 것이 다른 남자의 애를 임신해서 그런 거라는 루머를 보고 곧이곧대로 믿는 다른 직원들을 보며, 지성은 장고가 온라인 상의 데이터를 긁어와 알려준 정보는 의심 없이 신뢰하는 자신을 떠올린다. 온라인 상에 떠 있는 타인의 사생활 정보는 과연 믿어도 되는 걸까? 아니, 그 이전에, 타인의 사생활 정보에 접근해도 되는 걸까?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지성의 인간쓰레기 구남친 방정한(이시훈)이 지성의 동의 없이 보안 CCTV 영상을 다운받아 친구들에게 유포한 것은 분명한 범죄다. 그러나 그런 정한의 범죄를 알아내고 추궁하는데 사용된 데이터 또한 장고가 각종 보안을 뚫고 사용자 동의 없이 긁어온 도감청 정보다. 지성은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엄마 은화(황영희)에게 접근하는 젊은 남자가 괜찮은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장고를 사용한다. 정한의 범죄사실은 장고의 기능을 모를 때 우연히 알게 된 것이지만, 엄마의 연애상대의 뒷조사는 장고의 기능을 정확히 알고도 사용한 것이다.

상대가 쓰레기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한 선의의 도감청이니 장고를 사용해도 괜찮은 걸까? 갈수록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대에, 저녁 메뉴나 추천해주면 족했을 냉장고 AI가 흥미진진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MBC every1. 그래픽=이승한]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