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토크로 연명하는 ‘라스’의 서글픈 현실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우리는 지난해 여름 이맘때쯤 QPR이라는 축구팀을 알게 됐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축구클럽도 아니고 축구 강호들이 즐비한 런던에 연고를 둔 하부 리그를 전전하던 작은 축구팀이었다. 이 팀의 구단주는 2부 리그에서 승격하자 담대한 마인드로 공격적인 투자를 했다. 명문 팀에서 이름난 선수들을 수급해왔고, 청사진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기대는 날로 높아져갔다. 오프시즌과 시즌 초반에는 영국 내에서도 리그 어느 팀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축구관련 뉴스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고 홈 경기장에는 우리나라 광고가 심심찮게 보이는 등 국민적 관심을 받는 축구팀이 됐다. 박지성의 부활과 언더독이 사고를 치는 <외인구단>식의 스토리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등 당했다. 홈 관중동원 꼴찌, 유니폼 판매 꼴찌에 비례한 경기력으로 실망과 인내의 사리만 남겼다.

<라디오스타>의 이번 회는 마치 지난해 QPR의 행보를 보는 것 같았다. <라스>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한 김흥국, 이준, 사유리에다 최근 가장 잘나가는 ‘검색어 여신’ 클라라까지 올스타 스쿼드를 공개한 지난주 예고 방송이 나간 이후 기대는 증폭됐다. 이 멤버라면 시들어가는 <라스>가 다시 반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열혈 시청자들은 레전드 특집 탄생을 목도할 기대에 부풀어 ‘입방정 특집’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자 모래알 조직력과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준 QPR의 선수들처럼 어떤 유기적인 흐름도 구성도 호흡도 결정적으로 재미도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밖에 안 쓰는 칼럼에서 이주 연속으로 다룰 정도로 몰락에 가까운 변화는 심각해 보인다.

사유리는 마치 모코로의 아델 타랍처럼 방송을 사유했다. 초반 클라라에게 몸매 대결을 걸며 ‘상큼하지 않다’고 하고 ‘가슴은 있어?’라며 ‘애플’과 ‘워터멜론’의 비유를 통해 가슴 크기로 기 싸움을 펼치는 것까지는 예상한 바였다. 허나 쉬지 않고 모든 대화에 다 끼어들고 엉뚱한 발언을 남기면서 프로그램과 다른 이들의 흐름과 진로를 다 망가뜨렸다. 그렇게 시종일관 혼자 종횡무진하다 오버페이스를 하고 말았는지 후반부에는 지쳐버렸고, 시청자들도 그녀의 캐릭터에 지치고 말았다.

이준은 지브릴 시세를 위시한 결정력 떨어지는 공격진 같았다. ‘근육바보’ 캐릭터를 <라스>에서 만들어서인지 웃음 찬스와 분량은 가장 많이 주어졌지만 공만 끌다가 빼앗기거나 오프사이드에 빠지는 것처럼 매번 싱겁게 마무리됐다. 지루하고 식상한 UCLA 발음 코미디나 바퀴벌레 에피소드를 웃음 포인트로 삼는 헛발질을 하고, <라스>에 어울리지 않는 과한 <무릎팍>식 리액션이 방청객 웃음소리처럼 기계적으로 붙었다. 수차례의 기회 중 그가 그나마 한 건한 건 김흥국이 문전 앞까지 배달해준 선글라스 어시스트로 만든 웃음이었다.



그나마 김흥국은 지속적으로 웃음을 생산하고, 상황을 만들었지만 번뜩이던 시절의 클래스가 아니었다. 그는 무조건 돌진하고 들이대는 원탑 플레이를 해왔지만 놀랍게도 이번 <라스>에서는 마치 그라네로처럼 내려와 강약을 조율하면서 방송을 풀어갔다. 단발적인 웃음은 꾸준히 만들어냈으나 파괴력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피곤해보였다.

문제는 게스트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들을 <라스>의 레전드로 만든 것도 QPR스럽게 만든 것도 모두 <라스>다. 우선 질문과 편집, 자막으로 대표할 만한 <라스>의 정서가 사라졌다. 제작진은 엉뚱한 방향으로 변화를 가져온 마크 휴즈와 래드냅 감독 같았다. 윤종신의 말처럼 <라스>는 ‘MC 넷이 스스로 홍보하는 자리’이자 게스트를 데려다 놓고 MC들이 수다 떠는 방송인데, 지금은 게스트의 입만 바라보는 토크쇼가 됐다. 산만함은 <라스>의 대표적 특징이지만 그 예전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편’의 진행불가와 같은 럭비공 같은 예측불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를 듣기 위한 질문을 나열하고, ‘거짓말 대결’ 같은 꽁트가 맥락 없이 삽입되는 데서 오는 산만함이기에 문제가 있다.

이지훈은 예전 <라스>를 두고 ‘얻을 것 없는 방송’이라고 했지만 뜨기 위해 레깅스와 몸매를 내세운 건 아니라면서 연예인 사귄 이야기와 고백 받았던 무용담을 주요 콘텐츠로 풀어냈던 클라라를 보면서 <라스> 또한 홍보성 방송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어제만 해도 <한밤의 TV연예>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등장했던 클라라는 이제 템포를 낮춰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게스트를 샌드백처럼 만들고 민감한 이야기도 감성을 빼고 툭툭 던져서 당황시키는 것이 <라스>만의 정서이자 토크다. 그런데 이제는 게스트들도 캐릭터를 설정하고 시작한다. 사유리의 4차원 캐릭터나 이준의 바보 캐릭터를 콘셉트화한 것도 그렇고, 섹시 콘셉트를 솔직 당당으로 이어가려는 클라라도 그렇다. MC들은 <화신>처럼 게스트만 바라보고 방송한다. 특히 김구라는 복귀 후 계산할 수 없는 날카로움과 엉뚱함 대신 계산된 능글맞음으로 다소 안전하게 방송을 이끈다. 거기다 에피소드를 듣는 식의 대본 진행을 따르다보니 애드립과 비정형적인 토크로 모든 것을 웃음으로 비껴내던 <라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어제 같은 게스트를 모셔놓고도 찬양이 아닌 논란을 낳고 말았다.

방송가의 계륵 윤종신, 왕년의 스타 김국진, 인터넷 욕쟁이 김구라를 부활시킨 <라스>의 매력은 눈물까지도 웃음으로 희화화하는 정서와 능력, 그리고 작은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번지고 튀어서 흘러가다가 억지로 잡아오는 수다와 진행의 미묘한 줄타기에 있다. 말 한 마디에 백 마디가 붙을 정도로 수다가 활발한 방송이고, 흔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낄낄거리는 게 최우선인 방송이었다. 그런데 그 <라스>의 발랄한 매력을 파격에서만 찾는다면 어제처럼 성추행과 예능의 경계가 모호한 자극만 남고 웃음은 증발한 딱딱한 방송이 되고 만다.

실제 여성을 훑어보는 것도 위험한 행동이며, 19금 토크가 <라스>의 미래가 되어서도 안 된다. <라스>의 독설과 웃음의 칼날은 사실 게스트가 아니라 MC들에게 꽂혀야 한다. 게스트를 초대하긴 하지만 MC들이 만들어내는 수다에 소재일 뿐이라는 점, 따라서 별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무이한 파격적인 토크쇼 <라스>를 탄생시킨 배경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만의 수다가 사라지고 있다. 어제 방송은 강등권 탈출을 노리던 QPR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같은 강등권 팀과의 대결에서 완패하면서 놓친 경기인 셈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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