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2021’, 향수로만 끝나지 않는 알찬 동창회
‘전원일기 2021’, 여전한 가능성과 교훈, 경탄을 확인하는 시간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남지우·이승한·정석희 세 명의 TV평론가가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TV삼분지계]를 통해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MBC 드라마 <전원일기>가 거쳐온 시간의 더께를 헤아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22년 방송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한 작품이지만, 어느 덧 종영한 지도 18년의 세월이 흐른 작품 아닌가. 프로그램의 황금기를 목격하며 성장한 이들이라면 마치 어제 본 프로그램처럼 <전원일기>의 특정 에피소드를 집어서 기억해낼 수 있을 테지만, <전원일기>도 없고 명절 때 내려갈 시골도 없는 시대에 성장한 이들에게 <전원일기>란 너무 막연한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프로그램을 추억하고 그 의미를 기리는 작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미 <뉴 논스톱>, <커피프린스 1호점> 등 자사의 프로그램들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보는 기획을 선보인 바 있는 MBC <다큐플렉스>는, 호기롭게 <전원일기>의 세월을 돌아보는 대기획에 도전했다.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에게도 <다큐플렉스> ‘전원일기 2021’은 흥미로운 기획이다. 김정수 작가가 집필했던 <전원일기>의 황금기를 기억하는 정석희 평론가, 김정수 작가 하차 이후 캐릭터와 플롯이 일관성을 잃고 헤매던 시절의 <전원일기>를 보고 자란 이승한 평론가, 그리고 1996년생으로 <전원일기>를 보고 자란 기억 자체가 없는 남지우 평론가는 저마다 다른 지점들을 짚어냈다.

정석희 평론가는 <전원일기>를 ‘며느리 일대기’로 해석하며 “은영이(고두심)나 순영이(박순천)가 며느리를 봤다면 또 다른 전개였을 텐데” 아쉽다며 번외 편에 대한 가능성을 비쳤다. 22년의 세월 동안 안 한 이야기 없이 다 이야기한 것만 같은 <전원일기>였지만, 여전히 더 탐구할 만한 이야기의 잠재력이 있었던 프로그램이었음을 ‘전원일기 2021’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이승한 평론가는 ‘전원일기 2021’이 <전원일기>를 향해 사랑과 존경을 바치면서도 동시에 프로그램이 왜 쇠락했는지를 냉정하게 짚어낸 점에 주목했다.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프로그램을 만드는 창작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교훈을 찾아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한 번도 <전원일기>를 봤던 기억이 없는 남지우 평론가는, SBS <런닝맨>이나 최근 화제가 된 SBS <문명특급 – 컴눈명 특집>을 경유해 <전원일기>의 구성원들이 “22년을 방영하고 또 20년이 지난 지금에 다다라 모든 제작진과 배우들이 ‘동창회를 가능케 하는 인간’으로 끝내 남았다는 사실”에 경탄한다.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의 시선은 과연 누구의 시선과 가까울지, 비교하며 읽어봐 주시길.

◆ ‘며느리 일대기’의 끝자락에서 번외편을 상상해본다
<전원일기>는 무려 사대에 걸친 대가족과 그 주변 이웃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농촌 공동체의 이야기였다. 당시 하도 정부의 검열이 극심해 차라리 현실과 동떨어진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 도피하듯이 찾아낸 주제였다고 한다. 20년 넘게 방송된 터라 시청자와 극 중 캐릭터가 함께 성장했고 현실과 드라마의 경계가 무너져 많은 이들이 최불암, 김혜자 씨를 진짜 부부로 착각했을 정도로 친근한 드라마였다. 하지만 시대의 간극을 극복 못한 채 지지부진한 전개를 이어가다가 결국 22년 2개월 1088회를 끝으로 종영했다.

<다큐플렉스> ‘전원일기 2021’에서 김혜자 씨는 마무리 즈음에 자신을 극중에서 죽여 달라고 통사정했음을 고백한다. 박수 칠 때 떠나지 못한 것이, 가발 쓰는 거 외엔 별 의미 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가는 것이 연기자 입장에서 견디기 어려웠다고. 그러나 종영 후 이십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전원일기>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우연히 시작된 판타지 같은 농촌 이야기가 세대를 초월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한 마디로 마성의 드라마랄 밖에.
고두심, 박순천, 조하나, 세 손자며느리들이 시할머니 역의 故 정애란 님을 추억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겉으론 세상 둘도 없는 모범적인 가정이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있을 법한 가정사는 죄다 나오지 않았나. 박부용(정애란), 이은심(김혜자), 박은영(고두심), 고순영(박순천), 이남영(조하나), 며느리 일대기라고도 할 수 있었던 <전원일기>. 은영이나 순영이가 며느리를 봤다면 또 다른 전개였을 텐데,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든다. 특집으로 번외 편이 나왔으면!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지극한 사랑과 존경 뒤에서 배우는 날카로운 교훈들
<전원일기>를 향한 시청자들의 사랑이 식어가던 시기를 회고하던 김혜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화를 들려줬다. “택시 타면요. ‘진짜 <전원일기> 최고죠.’ 이러다가 ‘그런데 그거 요새 무슨 요일에 방송하죠?’ 이래요. 안 본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건 너무 마음 아프죠.” MBC <다큐플렉스> ‘전원일기 2021’을 관통하는 서사 중 가장 묵직한 질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때 수많은 이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모든 영광과 찬사를 누리던 이 전설적인 프로그램은, 어째서 출연하는 이들조차 염증을 느낄 만큼 쇠락해 버렸는가?
‘전원일기 2021’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제시한다. 등장인물 모두에게 나름의 개성과 고유의 서사를 만들어 주었던 김정수 작가가 하차한 이후, <전원일기>는 잦은 작가 교체를 경험한다. 그 과정에서 배우들이 공유하고 있던 <전원일기> 고유의 색채를 이해하지 못한 작가들은 입체적이던 캐릭터를 평면적이고 기능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으며, 플롯 또한 함께 붕괴했다. 여기에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전원일기> 인기의 원동력이었던 ‘도시인이 품은 고향과 대가족 제도에 대한 향수’가 소진되기 시작했고, 그 속도에 맞춰 플롯을 바꾸기엔 너무 먼 길을 와버린 <전원일기>는 마침내 22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기에 이른다.

‘전원일기 2021’은 이 전설적인 프로그램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을 표하면서도, 동시에 창작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과 딜레마들에 대해 신중히 고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서사의 편의를 위해 작품 속 세계를 납작하게 압축시키지 말 것. 이미 짜여진 작품 고유의 세계를 존중하되, 현실 세계와의 접점을 잃지 않도록 노력할 것, 오랜 시간 작품을 지키며 함께 만들어 왔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것. 콘텐츠의 제작과 유통 사이클이 한껏 짧아진 2020년대에도, <전원일기>가 남긴 교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순히 향수와 반가움만 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가르쳐 줄 것들이 남았다니, 과연 전설적인 프로그램은 드리운 그늘도 드넓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 동창회의 조건
SBS 예능 <런닝맨>에는 독보적인 지점이 있다. 출연진이 프로그램과 이별하는 방식이 그렇다. 경쟁 방송사의 대표 버라이어티 프로들에서 벌어진 멤버 하차와 교체 사례를 생각해보면, 갑작스러운 통편집과 모자이크 처리, 언급 금지(이른바 ‘언금’)등의 순간이 떠오른다. 출연진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불명예 퇴장하는 경우가 너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하면, 11년을 방송해온 <런닝맨>의 이별 방식은 정말이지 어른의 것처럼 보인다. 2016년 개리의 하차, 그리고 지난주 이광수의 하차는 정석적이고, 예의 바르게 이루어졌다. 1) 한 달의 시차를 둔 제작진의 공식 발표 2) 이후 3주 동안 멤버와 시청자가 함께 이별 준비 3) 마지막 방송에서 모두에게 인사한 후 최종 퇴장. 이렇게 잘 이별하는 것, 동창회의 첫 번째 조건이다.
동창회는 즐겁다. 하지만 즐거운 동창회가 모두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본 가장 감명 깊은 동창회는, SBS <문명특급-컴눈명 특집>에서 이루어진 그룹 애프터스쿨의 재결성 무대였다. 여전히 멤버들은 우정을 이어가고 있었고, 히트곡 ‘뱅!’과 ‘DIVA’를 부르니 그 시절 학창시절을 보냈던 지금의 2030이 감격에 무너졌다. 방송 이후, 애프터스쿨처럼 2010년대 초반을 수놓았던 그룹(ex. 카라, f(x), 시크릿, 포미닛 등)이 함께 추억됨과 동시에, 언급되어 마땅하나 차마 이제는 말할 수 없게 된 그룹(ex. 빅뱅, 동방신기 등)도 떠올랐다. 일부 멤버들의 어이없는 비행이 그들 사이의 동창회와, 동창회를 보며 소중한 기억을 되새기고픈 팬들의 소망까지 앗아갔다는 사실이 번뜩 느껴졌다. 모든 멤버가 모이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총동창회가 가능한 <런닝맨> 같은 프로도, 애프터스쿨 같은 그룹도, 이제는 많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1996년에 태어난 내가 <전원일기>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드라마에 대해 본 바, 아는 바, 들은 바가 거의 없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나를 감탄케 한 것이 있다면, 22년을 방영하고 또 20년이 지난 지금에 다다라 모든 제작진과 배우들이 ‘동창회를 가능케 하는 인간’으로 끝내 남았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았다. 누군가 내게 <런닝맨> 같은 11년, 혹은 <전원일기> 같은 22년 근속의 일자리를 제안한다면, 과연 나는 일터에서 불명예 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프지 않고, 사고 치지 않고, 십여 년을 성실하게 자리할 수 있을까? 앞서 동창회를 불가능하게 만든 어떤 연예인들이 미워 죽겠는 건 사실이지만, 나 역시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동창회를 기대할 권리, 부끄럽지 않게 추억할 권리를 지켜준 이들을 생각해보면, 애프터스쿨과 <런닝맨>, 그리고 <전원일기>를 한 자리에 놓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남지우 칼럼니스트 Instagram @jmbar_jwjw
[사진·영상=MBC. 그래픽=이승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