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종’, 이 음산한 영화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셔터>의 감독 반종 피산다나쿤이 연출하고 <곡성>의 나홍진이 제작과 시나리오 원안을 맡은 호러 영화 <랑종>이 얼마 전에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를 거쳐 극장 개봉했다. 원래 아이디어는 <곡성>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캐릭터 일광이 나오는 프리퀄이었다는데, <랑종>의 이야기는 <곡성>과 연결점은 없다. 하지만 이 두 영화가 같은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속해있다고 주장하는 관객들도 없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파운드 푸티지물이다. 태국의 토착신앙에 대한 영화를 찍는 다큐멘터리 팀이 님이라는 무당 그러니까 랑종을 인터뷰한다. 님의 형부 장례식에 참가한 팀은 님의 조카 밍에게 신내림의 징후가 보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과정을 따라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영화가 ‘파운드 푸티지’가 될 수밖에 없는 나쁜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게까지 무섭게 본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건 큰 정보값이 있는 문장은 아니다. 공포란 주관적이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것을 무서워한다. 이 영화를 덤덤하게 보았다고 해서 <랑종>을 무섭게 본 관객보다 내가 더 나은 관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호러영화가 주는 건 꼭 자극적인 공포만이 아니다. 음산하고 찜찜한 불쾌함과 같은 감정도 공포만큼이나 중요하다. <랑종>은 후자 쪽이 조금 더 강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본격적인 액션이 나올 때까지 발동이 좀 오래 걸리는데 이것 역시 단점이라 보기는 어렵다. 발동이 늦게 걸리는 건 이 장르의 고전인 <엑소시스트>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주변에 정체를 알 수 없고 악의에 차 있는 미지의 존재들이 들끓지만 과연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의 공포 역시 보여주는데, 단번에 만족스러운 자극을 주지는 않지만 이를 그냥 넘기기도 쉽지 않다.

<랑종>이 시사회에서 공개된 뒤 가장 먼저 지적을 받았던 것은 영화의 여성 학대 또는 여성 혐오적인 성격이었다. 그만큼이나 지적받은 건 스토리 안의 동물학대였다. 여기에 대한 내 원론적인 답변은 영화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만 그 ‘무슨 일들’을 다루는 방식이 모두 용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꼭 감독의 의도대로 반응해야 한다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영화 속 개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개는 죽이지 않는다’라는 할리우드 영화의 클리셰가 먹히지 않은 지는 오래 됐다. 반대로 요새는 호러 영화에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이 나오면 일단 긴장하게 된다. 거의 모든 동물들이 중간에 무참하게 살해당하기 때문에. (그래서 최근엔 개가 끝까지 살아남았던 <크롤> 같은 영화가 오히려 두드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개를 죽인다는 행동이 과연 관객에게 의미있는 자극을 줄 수 있는가는 의심스럽다. 일단 관객들은 ‘호러 영화 속 개들은 모두 죽는다’라는 새 클리셰를 통해 이를 바라보고 개가 죽기 전부터 집중력이 분산될 가능성이 크다. 개의 죽음이 약자에게 가해지는 손쉬운 폭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깊은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지적되어야 한다.

영화가 밍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밍은 영화 내내 호러 영화가 젊고 예쁜 여자들에게 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착취를 통과한다. 호러 영화 장르는 원래 이런 면에서 악명이 높았고, <랑종>이라는 영화가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나 표현을 개발한 것은 아니다. 장르의 역사 안에서 보면 특별히 심하게 선을 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과거에 당연한 듯 했다고 해서 지금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게으르다. 일단 호러를 포함한 모든 장르의 영화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거나 그에 맞서 투쟁하며 더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답습에 불과할 테니까. 발전 없는 영화의 가치관도 문제가 되지만 호러 효과 역시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이 영화에서 밍이 겪는 끔찍한 일을 대부분은 의도만큼 충격을 주지 못한다. 이 대부분이 이미 관습화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특징과 문제점이 모두 올라온다. 이 장르의 함정 중 하나는 일반 극영화에서 가능한 모든 걸 담겠다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영화가 인위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랑종>은 비교적 초반부터 다큐멘터리의 그럴싸함을 잃는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예측불가능한 현재를 실시간으로 잡는 다큐멘터리 카메라와는 다른 식으로 움직인다. 악명 높은 생리 장면을 보자. 여기서 카메라는 왜 밍이 난처해하는지 곧장 보여주는 대신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남자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다시 밍의 하반신을 보여준다. 이건 철저하게 대본이 있는 극영화의 논리이다. <랑종>은 러닝타임 내내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인지 그 수가 보이는 영화이다. 특히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넣기 위해 일부러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때는 더욱 그렇다.

파운드 푸티지의 미묘한 장점은 카메라를 영화의 의도와 분리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카메라, 심지어 편집자도 허구의 이야기 속 허구의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우리는 <랑종>의 카메라가 음흉하고 불쾌하며 대상의 인격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는 건, 이것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카메라맨들의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이들을 대놓고 조롱하면서 끝난다. 이들은 후반에서 카메라와 시선의 권력을 모두를 빼앗긴다.

이것이 영화의 의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편집된 모양은 여전히 그 의도가 얼마나 진지한지 의심하게 한다. 그렇다면 편집자 역시 영화 속 카메라맨과 같은 족속인 것인가? 그렇게 읽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읽으려면 지난 두 시간 관객들이 본 영화 전체가 의도적인 쓰레기이고 관객들이 이를 비판함으로써 영화의 감상이 완료된다는 뜻인데,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이를 의도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랑종>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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