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90년대 가수 김혜림이 다시 주목받을 수 있는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1990년대 초반 신세대, X세대라고 불리던 젊은이들이 사회 전면에 등장했다. 대중문화 역시 이런 흐름 속에 급박하게 달라졌다. 특히 1992년과 1993년에 발표된 015B의 3집과 4집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나 <신인류의 사랑>은 젊은 세대의 솔직한 속내를 닮은 노랫말이 화제였다.

한편 1993년에 발표된 김혜림의 <있는 그대로>라는 노래가 있었다. 비록 표절 문제 때문에 노래는 히트 전에 방송금지 됐지만, 노래의 청량한 매력 덕에 지금의 MZ세대 시티팝 마니아들에게 재발견 되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있는 그대로>는 1980년대 후반의 댄스뮤직이나 전형적인 발라드와도 다른 미디엄 템포로 김혜림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곡이다. 김혜림의 목소리는 시원시원하게 쏘거나 화려한 기교, 혹은 ‘트롯’풍의 노래와는 썩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살랑살랑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의 저녁처럼 기분 좋은 리듬에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흐름에 얹힐 때 굉장히 시원하게 들린다. 소위 지금의 시티팝에 최적화된 보컬인 것이다.

한편 당대의 스타 작사가 박주연이 쓴 <있는 그대로>의 노랫말은 015B 못지않게 1990년대 새로운 세대의 솔직한 코드가 녹아 있다. ‘물론 나도 알고는 있어 남자 앞에서 수줍은 척하며 튕겨야 좋은 걸/하지만 어색한 걸 난 어떻게’부터가 기존의 여성가수의 사랑 노래에는 잘 나오지 않던 가사였다. 여기에 ‘나는 잘 몰라, 세련된 사랑의 기술/하지만 거짓 없는 내가 사랑의 시작일거야.’로 새로운 세대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김혜림의 노래는 1980년대의 시적이고 구구절절한 사랑 노래와는 확실하게 맥락이 달랐다.

<있는 그대로>는 김혜림이 스타로서 보여준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노래이기도 했다. <나에게 보여줘/멋지게 만 보이려 말고/우리 있는 그대로 모습으로 사랑을 해>는 사실 김혜림이 대중에게 보여준 이미지였다. 실제로 최근 tvN스토리 <차트 시스터즈>에 출연해 <있는 그대로>의 가사가 자기 이야기라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가수 김혜림은 1990년대 꾸밈없이 잘 꾸미는 소위 ‘꾸안꾸’ 느낌의 무대매너를 보여주었다. 그 이전 세대들이 보여준 노숙한 무대매너의 가수들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하지만 1950년대의 대스타 나애심의 딸답게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타고난 무대 매너가 좋았다. 또한 소위 청순과 섹시로 분류되는 강수지, 김완선과는 전혀 다른 쿨하고 솔직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김혜림은 큰 팬덤을 보유한 가수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혜림의 매력은 소위 X세대 여성들과 비슷한 감성이었는데, 그러기에는 김혜림은 1980년대 후반에 너무 일찍 등장했다. 또한 <DDD>나 <이젠 떠나가 볼까> 같은 김혜림의 히트곡들은 묘하게 10대 하이틴보다는 20대 초반의 정서와 더 맞는 부분이 있었다. 당연히 이상은이나 김완선, 이선희, 소방차, 박남정처럼 10대 팬덤기반의 스타들과는 달랐을 터였다. 그렇다고 양수경처럼 성숙한 보이스로 중장년층까지 널리 사랑 받을 수 있는 가수도 아니었다.

 

아쉽게도 그 시대에는 김혜림이 지닌 음색이나 목소리에 대한 평가도 박한 편이었다. 특히 2집의 <때가 되면>처럼 그녀의 보컬 매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서정적인 발라드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는 못했다. 여기에 김혜림 역시 2집과 3집 사이, 3집과 4집 사이에 슬럼프를 겪으면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이후 4집에서 김형석과 손잡고 본인이 직접 제작한 <날 위한 이별>이 크게 사랑받고, 여성들의 노래방 애창곡이 되면서 김혜림은 발라드 가수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처럼 김혜림은 분명 인상적인 히트곡들을 내놓았지만, 아쉽게도 그녀와 가장 잘 어울렸던 시대에 화려하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빅스타들의 친구로서 더 많이 알려졌다.

최근 김혜림은 다시 한 번 본인의 매력을 보여줄 만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KBS <불타는 청춘>을 통한 컴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달 그녀는 tvN스토리 <차트 시스터즈>에서 30년 만에 금지곡에서 풀린 <있는 그대로>를 부르면서 등장했다.

이후 김혜림은 송은이, 김신영, 안영미, 신봉선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가요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혜림이 이야기에는 1980년대 삼촌처럼 따르고 그녀를 가수로 키워준 조용필부터 어린 시절 친구였던 <듀스>의 이현도까지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했다.

김혜림은 당시 가장 빛났던 스타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성기 시절 연예계의 마당발이었던 만큼 레트로 시대의 대중문화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지닌 스타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것이 김혜림이 지금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 될지도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tvN스토리, SBS]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