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공화국 현실에 질식된 ‘비상선언’의 영화적 재미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시작은 영화 <다이하드>류의 항공기 테러를 둘러싼 액션 스릴러를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선한 얼굴로 사람들이 많이 탄 비행기를 물어보는 테러범 진석(임시완)은 그래서 더 소름끼쳤고, 그가 비행기를 선택해 타고 거침없이 테러를 진행하는 과정은 긴장감을 한껏 끌어 올렸다. 하지만 테러범들과 싸우는 시원시원한 액션 스릴러를 기대했던 마음은 초반 설정을 지나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이건 그런 류의 영화가 아니라는 게 금세 드러났다. 그리고 그건 영화 <비상선언>에 비상이 걸리게 된 시작점이었다.

송강호에 이병헌 그리고 전도연이 출연했다. 여기에 김남길, 임시완, 김소진 같은 배우들까지 더해졌다. 게다가 한재림 감독이다. <관상>, <더 킹>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던 감독. 그러니 이 정도의 배우진과 제작진이 함께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의 기대감은 한껏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에 세워진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는 좀 더 시원한 카타르시스에 대한 요구가 더 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상선언>은 감독도 매체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했지만 테러 영화가 아니라 ‘재난 영화’다.

<비상선언>은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재난의 풍경들이 영화 곳곳에 담겨져 있다. 테러를 벌이는 임시완의 면면에서 대구지하철 참사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 혼돈의 재난 상황 속에서도 자신보다는 승객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무장 희진(김소진)에게서 세월호 참사의 ‘숨은 영웅들’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게다. 물론 테러에 쓰인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비행기 속 상황은 코로나19로 함께 숨 쉬는 일이 공포되기도 했던 최근의 상황이 떠오르고,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과 나누는 문자메시지나 통화는 대구지하철 참사와 세월호 참사에서의 가슴 아픈 장면들이 여지없이 떠오른다.

즉 비행기가 테러를 당하지만 이 영화는 테러범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테러에 의해 만들어진 재난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해가는가를 보여주고, 누군가의 생명을 두고 벌어지는 이기적인 현실을 보게 만들며, 그럼에도 그 재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를 말해준다.

물론 영화 속 상황들이 100% 리얼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일종의 가상으로 그런 상황을 상정하고,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묻는 영화에 가깝다. 마치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책에서 언급하곤 하는 가상 상황을 던져놓고 그 답에 대해 과연 그런 선택이 정의로운가를 묻는 그런 성찰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영화다.

<비상선언>은 그래서 바로 이러한 재난영화적인 관전 포인트를 갖고 보면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는 영화지만, 애초 테러범과 싸우는 블록버스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보면 대단히 실망스러울 수 있는 영화다. 한국 사회가 이른바 ‘재난공화국’으로까지 불리게 된 그 현실에 대한 성찰을 하고, 그 재난 속에서도 끝까지 싸워온 이들이 저마다 자기 위치에서 본분을 다한 평범하지만 위대한 인물들이라는 점을 발견하는 과정은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블록버스터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시원시원한 액션 따위는 없는 이 영화를 보면서 두 시간 넘게 비행기에 갇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그 과정들이 답답함을 안길 수밖에 없다. 영화에 대한 혹평 속에서 과도한 ‘신파’ 설정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건 그래서 이 영화가 진짜 신파라서라기보다는 실제 벌어졌던 비극들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 겹쳐져서 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부터 대구지하철 참사 등을 거쳐 최근 세월호 참사와 광주 아파트 붕괴 사건으로까지 이어지는 끝없는 재난에 대한 기억들은 잊혀질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괴물을 등장시켜도(봉준호 감독의 <괴물>), 좀비가 등장해도(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재난상황에서의 콘트롤 타워 부재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영화로 그려지곤 했다. 물론 <감기>, <연가시>, <해운대>, <타워>, <판도라> 등등 무수히 많은 재난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 역시 바로 그런 비판의식이었다.

그래서 이 계보의 연장선으로서 <비상선언>을 보면 이 작품이 그리려던 것이 무엇이고,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가 좀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비상선언>의 이런 지점들은 결코 관객들에게 기분 좋은 체험을 해주게 하는 영화는 아니다.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자기성찰이나 반성을 하게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총 제작비 300억 원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가 비상(飛上)하지 못하고 비상(非常)이 걸린 이유는 바로 이런 기대와는 엇나간 작품의 진짜 의도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물론 이 재난 상황을 통해 너무 많은 현실적 비극들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여 은유하려한 그 과잉도 아쉬운 지점이지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비상선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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