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는 강력한 사이다 원하는데 사연이 구구절절해서야(‘재벌×형사’)

“너는 대체 어떤 세상에서 사는 거냐?”

“웬만한 건 다 되는 세상.”

지난 6화에 나온 이 짧은 대화는 SBS 금토드라마 <재벌×형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수그룹의 재벌 2세 진이수(안보현)가 얼떨결에 형사가 되면서 드라마는 시작된다. 유능하고 매력적인데, ‘서민’이고 ‘털털한’ 이강현(박지현) 팀장과 함께 좌충우돌하면서 힘을 합쳐 범죄를 소탕한다. 익숙한 기대를 갖게 하는 사이다 드라마지만, 악의 축으로 주로 묘사되어온 재벌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돈의 맛을 수사에 활용하면서 새로움을 만든다.

슈퍼카로 출근하고, 회원제 클럽 등을 프리패스로 다니고, 요트를 타고, 돈 10억을 미끼로 태우고, 헬기를 부르는 등 사비의 수사화라는 플렉스를 보여준다. 즉, 부정적으로 그려져 온 재벌가들의 파워와 행태를 ‘내 편’으로 가져온 트위스트가 흥미롭다. 얼마 전 JTBC <힘쎈여자 강남순> 등에서도 부유한 형사가 등장했지만, 재벌의 플렉스를 선보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재벌 형사 캐릭터는 새로움 뿐 아니라 K-사이다 드라마의 기본 설정들을 담보한다. 2019년 <열혈사제> 이후로 시작된 정의구현 판타지를 담은 사이다 드라마에는 몇 가지 공유하는 설정이 존재한다. 기본적인 톤은 가볍게 가면서 정의구현과 액션으로 탄산을 터트린다. 주인공은 배트맨처럼 주류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도 대체로 이미 잘 산다. 밥줄을 위협받지 않는 무한한 경제력은 현실감각을 담는 동시에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립을 발판 삼아 주인공들은 기존 시스템 밖에서, 현실논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의지와 주관대로 행동해 우리 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의 수평을 맞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공분이다. 현실에서 넘어서지 못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사회악, 문제들을 부수고 해결하는 판타지를 스토리라인으로 잡고 소재로 활용한다. 그런데 <재벌×형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의 정의구현, 사이다 드라마가 추구해온 재미를 진이수와 이강현이 개인적인 사연을 해결해나가는 과정 속으로 훨씬 더 많이 가지고 들어온다.

물론 다른 드라마들도 캐릭터를 구축하고 그 사연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기본적이긴 하지만, 시청자들이 드라마 속의 세계관에 몰입하게 만드는 거악이나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는 공분의 명분이 적다. 능력 출중하고 성실한 팀장인 이강현을 움직이는 동기는 평생을 몸 바친 뛰어난 형사였지만 누명을 쓰고 불명예 퇴직한 아버지(권해효)의 명예회복에 있다. 진이수는 재벌 2세지만 스스로 말하듯 진자 금수저는 아니며, 비극적인 가정사를 갖고 있다. 이를 깨우쳐가고 그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이 극의 줄거리다. 문제는 빌런의 존재가 아직까지 움직이고 있는 게 없으니 주는 긴장감도 없다. 최종 빌런이 누군일지 강하게 짐작되긴 하지만 16부작 중 6회까지 진행된 시점까지도 거대한 악의 세력이 빌드업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조금은 도식적이다. 흔히 말하는 아버지 서사를 차용한 이강현 형사 부녀의 사연은 너무 눈에 익숙한 설정이고, 마냥 가벼워 보이는 진이수 형사가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바로잡는 과정을 암시하는 복선들은 꽤나 투명하다. 이강현 아버지의 누명과 진이수의 트라우마가 된 사건과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이강현의 아버지가 과거 담당한 범죄현장이기도 한 앞집에 진이수가 산다. 이 정도면 사실상 그냥 딱 천생연분인데, 천생연분인 이유를 차근차근 듣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초반에 힘이 붙지 않는다. 시간이 없는데, 포장에 공을 들이고 있는 점원 앞에 선 기분이랄까.

SBS에 드라마 전성시대를 열어준 금토드라마 편성블록은 지난해 여름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재벌×형사>는 단순하더라도 초심이란 차원에서 기대를 갖게 했다. 빠른 호흡, 껄렁해 보이지만 순수하며 사연을 가진 진이수를 비롯해 캐릭터, 박지현 등 캐스팅의 참신함이 돋보인다. 수사물의 재미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고 싶은데 자꾸 주인공들의 사연을 설명하고 당위를 굳이 얻으려 한다.

이렇게 개인의 사연으로 스토리의 흐름이 집중되는 사이 시청자들과 교감할 드라마 속 세계관과 판타지가 빈약해진다. 주인공들의 활약으로 달라질 세상이 딱히 궁금하거나 그 과정에 응원과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된다. 아마도 극 후반 벌어질 진이수 어머니 죽음의 비밀과 한수그룹의 추악함 등이 거악의 실체로 점점 드러나면서 진이수와 이강현의 팀에게도 점점 높은 수준의 도전이 다가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가상의 재벌가 내 비극을 바로잡는 과정이 시청자들에게 사이다로 다가오게 만들려면 거쳐야 할 단계가 많다. 우리는 계란으로 바위를 조각내는 판타지를 원하는데, 자꾸 어떤 계란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아직까지 왜 부셔야만 하는 바위인지 보이지 않는 셈이다. 또 한 잔의 사이다를 기대했는데 아직은 톡 쏘는 맛이 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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