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이 아닌 연줄이 승패를 가르는 걸 누가 보겠나(‘데블스 블랜: 데스룸’)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넷플릭스 서바이벌 예능 <데블스 플랜: 데스룸>. 시작은 그럴듯했으나 끝은 손사래를 치게 만드는 ‘용두사미’ 그 자체였다. 이 프로그램이 불쾌한 건 사실상 사회의 불합리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생활동’과 ‘감옥동’이라는 설정은 계급의 고착을 정당화하는 장치였고, ‘운’이라는 이름의 시작점은 이미 결과를 암시하고 있었다. 감옥동 멤버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생활동으로 이동하기 어려운 구조. 공정은 가능성에서 출발해야 하건만 애초에 기회가 봉쇄된 경쟁이었다. 게다가 제작진이 종영 후 이런 말을 했다. 자신들이 거짓말과 배신을 권한 것이 아니라며 정확한 워딩은 ‘당신의 승리가 추악한 거짓과 배신으로 얼룩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박수 쳐드리고 상금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곱씹을수록 씁쓸하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기본 도덕은 어디로 갔는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남을 배려하라고 당부 또 당부를 해왔으나 이 프로그램은 거짓과 배신을 전략으로 삼으라고 부추긴다. 정당화한다. 이른바 ‘현실을 반영한’ 게임이라면 차라리 현실을 반성하게 만들어야 옳지 않나.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과 절묘한 전략이 두뇌 서바이벌의 매력이었다면 <데블스 플랜: 데스룸>은 그 명제를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다. 전략이 아니라 정치, 실력보다 편 가르기, 상호 존중보다 불신과 고립. 이 모든 양상이 반복되는 사이 시청자는 점점 피로감을 느꼈고, 결국 무너진 진정성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실력자들이 묻히고 전략이 아닌 연줄이 승패를 가르는 양상. 정현규의 반복되는 거짓말, 윤소희의 모순된 행보, 규현을 향한 연합의 과보호까지. 진짜 뛰어난 능력자가 누군지 알고 싶은 바람과 달리 시청자가 본 건 누가 더 ‘편한 편’에 섰는지, 이른바 연합이었다. 전략과 기지가 아니라 연합과 눈치 싸움이 승패를 좌우했다면 그건 게임이 아니라 정치가 아닌가.

어둠이 있다면 빛도 있다. 손은유를 필두로 감옥동에서 매일 저녁 데스 매치를 치르며 꿋꿋하게 버틴 이들, 용기 있게 감옥동 히든 스테이지에 가장 먼저 도전한 이승현 같은 참가자가 이 프로그램의 유일한 존재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불합리한 환경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성실히 게임에 임한 참가자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데스룸>을 끝까지 시청할 수 있었다. 이들이 보여준 근성으로 인해 제작진의 무책임한 설계가 더욱 부각되지 않았을까?

김하린의 활약도 인상적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처음으로 선택했다’는 마지막 말은 프로그램 전체를 돌아보게 만드는 통찰이기도 했다. 사실상 일부 출연자는 게임에 적응조차 하지 못한 채 밀려나야 했다.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실력 부족이 아니라 불합리한 설계로 인해, 즉 연합에 끼지 못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이는 고스란히 프로그램의 구조적 결함으로 연결된다.

제작진이 과연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혹은 알면서도 방치했던 것인지. 만약 그들이 현실의 축소판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 안에서 최소한의 질문이라도 던져야 하지 않나.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아무런 질문도, 반성도, 의미 있는 반전도 만나지 못했다.

방송이란 무엇인가. 예능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웃음을 주지 못한다면 최소한 생각할 거리라도 있어야 옳다. <데블스 플랜: 데스룸>이 남긴 건 불쾌감과 씁쓸함뿐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왜 만들었는지 묻고 싶다. 그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데스룸'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데?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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