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원의 문화산업비평]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나라는 대략 인도, 나이지리아, 미국 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화시장의 규모로 보면 미국과 일본이 단연 압도적이다. 지난 2010년 한 해 동안 미국과 일본 영화시장은 각각 105억 6520만 달러, 2207억3700만 엔의 극장수익을 거둬들였다.
세계 최대 규모다. 또한 미국과 일본 모두 DVD/블루레이 등 2차 시장 비중이 1차 시장보다 크고, 그밖에 관련 완구 등 3차 시장 비중도 어마어마하다. 천혜의 환경이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은 시장규모뿐 아니라 시장구성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양국의 지난 2010년 극장흥행 베스트 10을 살펴보자. 먼저 미국이다. 1. 토이 스토리 3 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3. 아이언 맨 2 4. 이클립스 5. 인셉션 6.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부 7. 슈퍼배드 8. 슈렉 포에버 9. 드래곤 길들이기 10. 라푼젤. 그리고 일본이다. 1. 마루 밑 아리에티 2. 더 라스트 메시지 우미자루 3. 춤추는 대수사선 더 무비 3: 그 녀석들을 해방시켜라 4. 극장판 포켓몬스터 DP 환영의 패왕 조로아크 5. 스페이스 배틀쉽 야마토(예상치) 6. 고백 7.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 후편 8. SP 야망편 9. 명탐정 코난 천공의 난파선 10. 영화 도라에몽 노비타의 인어대해전.
금세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비중이다. 양국 모두 2010년 1위는 애니메이션이다. 베스트 10 구성을 살펴봐도 미국은 10위 내 5편, 일본은 4편이 애니메이션이다. 상위권 시장의 절반을 애니메이션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미국과 일본에서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시장을 탄탄하게 뒷받침하는 중요한 한 축이자 시장의 폭발성을 이끌어내는 선도 주자, 이른바 블록버스터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물론 미국과 일본 영화시장이 늘 이랬던 건 아니다. 1980년대만 돼도 미국에선 10년 동안 단 한 편의 애니메이션도 연간 통산 베스트 10 내에 든 일이 없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라이온 킹’ ‘미녀와 야수’ 등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부활하면서 시장 파이가 늘어났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토이 스토리’를 앞세운 픽사의 질주로 CG애니메이션 붐이 일었다. 그렇게 계속 성장세를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애니메이션이 시장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대략 3, 4년 전부터로 봐야한다. 이전까진 베스트 10 내에 애니메이션이 많아야 2편, 대부분 1편 정도였다.
일본 역시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도라에몽’ 시리즈나 마쓰모토 레이지 TV애니메이션의 극장판 정도만 시장에서 역할 하는 상황이었다. 베스트 10 내 애니메이션은 많아야 2편, 대부분 ‘도라에몽’ 하나였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초강세를 보이면서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1990년대 중후반이 되자 ‘도라에몽’과 ‘명탐정 코난’, ‘포켓몬스터’ 등 3총사가 시장 중심에 서게 돼 매년 베스트 10을 장악하게 됐고, 최근엔 ‘원피스’도 대박 흥행 대열에 서 4총사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결국 미국은 3, 4년 전부터 애니메이션 대세가 이뤄졌다면, 일본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대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
이쯤 되면 미국과 일본 영화시장의 애니메이션 붐 근원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양국 애니메이션 부흥기는 양국의 경제 불황과 맞물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버블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10년’ 또는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시점은 대략 1990년경부터다. 그 여파가 제대로 드러나게 된 건 1990년대 중후반부터로 봐야한다. 애니메이션 3총사가 베스트 10 안을 휘집고 다니기 시작한 시점이다. 미국 역시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어마어마한 수준의 경제 불황이 닥치면서 애니메이션 붐이 가속화된 모양새다. 특히 2009년과 2010년에 이 같은 현상이 눈에 띄게 가시화됐는데, 2009년과 2010년은 모두 구직단념자까지 포함한 실질적 실업률이 16%를 넘어서던 시점이었다.
물론 단순히 1990년대 일본과 2007년 이후 미국 상황만을 놓고 ‘애니메이션 부흥=경제 불황기’라는 공식이 나오는 건 아니다. 돌아보면 1990년대 초중반 미국 애니메이션 붐도 조지 부시 정권의 경제 불황 시점과 맞물리고, 애초 월트 디즈니가 미키 마우스를 필두로 미국 애니메이션 역사를 써내려 간 1920년대 역시 미국의 대공황 시점과 맞아 떨어지고 있다. 더 찾아보면 볼수록 경제 불황과 극장용 애니메이션 간 관계는 점점 더 깊어진다.
왜 그럴까. 사실 단순한 얘기다. 경제 불황기 대중은 기본적으로 지출을 줄여나가는데 있어 가장 먼저 문화 관련 소비부터 줄인다. 생활과 밀접한 관계는 없는 지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경제 불황기에는 영화 입장권 판매나 음반 판매가 준다. 미국만 해도 지난해 극장 입장권 판매량은 전년도에 비해 무려 5.2% 감소, 8000만 장 가깝게 떨어졌다.
그러나 부모 마음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다. 자녀들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특히 아직 유소년기에 놓인 자녀들의 문화 소비만큼은 마지막 보루로서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다. 결국 경제 불황기에는 여타 성인용 내지 청소년용 실사영화 흥행 수치는 떨어져도 유소년용 애니메이션 흥행은 유지됨으로써, 전반적으로 ‘애니메이션 붐’이 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 방증사례가 일본의 ‘도라에몽’ 시리즈다. ‘도라에몽’은 일본이 고도성장 열매를 맛봤던 1980년대 전반부터 버블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버블이 꺼진 1990년대 전반, 극심한 경제 불황이 밀어닥쳤던 1990년대 후반, 불황 속 안정기였던 2000년대 전반, 그리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현재까지 모두 겪어가며 30년째 생존한 시리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입장권 판매량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5년씩 잘라 봐도, 1980년작 320만 장, 1985년작 240만 장, 1990년작 380만 장, 1995년작 260만 장, 2000년작 295만 장, 2005년작 283만 장, 2010년작 300만 장으로 나온다. 대략 250~350만 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영화산업 전체는 경제 여건과 맞물려 롤러코스터를 타듯 움직여댔지만, 애니메이션만큼은 거의 일직선에 가까운 시장을 유지해냈다는 것이다.
이렇듯 안 그래도 ‘애니메이션 붐’이 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근래 들어서는 여기에 플러스알파가 더 생겼다. 극장용 애니메이션 전체를 3D로 재편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다. 3D 극장의 입장권은 일반 2D의 그것보다 약 40%가량 더 비싸다. 그렇게 비싸게 붙여 판 탓에 ‘스텝 업 3D’ ‘쏘우 3D’ ‘피라냐 3D’ 등 성인용 실사영화들은 부진을 면치 못했지만, 오히려 애니메이션은 대박이 났다. 부모는 유소년기 자녀가 보고파 하는 영화는 40% 더 비싼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보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프리미엄까지 더 붙다 보니 결국 흥행 베스트 10 내 절반이 애니메이션으로 그득 차는 현상까지 낳게 됐다는 것.
한 마디로 지금은 ‘애니메이션 천하’가 될 수밖에 없는 시점이라는 얘기다. 경제 불황이 진정되기 전까진 이 같은 상황이 꾸준히 지속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더욱 심화되리라는 예상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여기서 한국을 돌아보자. 한국 영화시장 역시 장기화 된 경제 불황 여파를 받고 있긴 마찬가지다. IMF 외환위기 시점인 1997년 즈음부터 시작된 흐름이다. 그리고 한국 역시 애니메이션 시장은 호황기나 불황기나 마찬가지로 반응이 좋았다. 호황기였던 1990년대 초중반부터도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일대 붐을 일으켰지만, 경제 불황이 밀려왔던 21세기 초반에도 ‘슈렉’(’01) 234만4700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04) 301만4800명 등 히트작들이 줄줄이 나왔다. 근래에도 ‘쿵푸 팬더’(’08) 467만5712명 등 꾸준한 시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일본이 크게 다른 점이 있다. 한국은 이처럼 안정된 시장, 장기화 된 불황에도 자기 역할을 꾸준히 해주고 있는 시장에 자국 콘텐츠를 투입시키려 들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전 성공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간 ‘마리 이야기’ ‘천년여우 여우비’ 등이 시장에 꾸준히 도전했지만 한 편도 빠짐없이 참패를 겪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은 ‘안 되는 장르’로 낙인 찍혀버렸고, 투자유치부터가 어렵게 됐다.
이유는 뭘까. 기술력 부족, 기획력 부족 등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지만, 사실 가장 큰 원인은 시장파악 부족이다. 한국은 대부분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각본 자체가 오리지널은 아니라 해도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화는 된 적 없는 소재만을 골랐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오판이었다. 월트 디즈니나 가능한 일을 벤치마킹한, 뱁새가 황새 따라간 격이었다.
당장 일본만 해도 그런 일은 잘 안 한다. 앞서 언급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3총사, ‘도라에몽’ ‘포켓몬스터’ ‘명탐정 코난’만 해도 그렇다. 모두 TV애니메이션의 인기를 이어낸 극장판이었다. TV애니메이션 베이스 없이 20억 엔 이상의 흥행을 기록할 수 있는 건 일본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뿐이다.
유소년층은 ‘새로운 것’에 딱히 매력을 느끼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익숙한 것’에 반응한다. 유소년층을 잠깐만 관찰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한 번 본 콘텐츠를 수도 없이 반복해 보고파 하는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TV를 통해 닳고 닳도록 본 애니메이션이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런 애니메이션이기에, 그 극장판이 나오면 곧바로 극장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도 이런 기본적인 시장파악부터 시작해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재편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 사례도 존재한다. 1995년 이현세 만화원작으로 큰 기대를 모았던 극장용 애니메이션 ‘아마게돈’이 쓰러지고 난 뒤, 다시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던져준 콘텐트는 바로 1996년작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이었다. 아직까지도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 역대 흥행순위 4위에 랭크돼있는 히트작이다. 그리고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과 ‘아마게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둘리’의 경우 TV애니메이션 인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콘텐트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국도 지금 당장 실험해볼 만한 콘텐트가 있다. 유소년층에 가히 현상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TV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다. 관련 상품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쏟아질 정도로 큰 반응을 얻고 있다. 그 주제곡을 틀어주지 않는 유치원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여기서부터 시작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리지널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시도나 유소년층을 벗어나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실험은 그 다음 단계다. 아직은 거론할 만한 게 못 된다. 걸음마도 아직 못 뗀 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키는 격이다. 일단 될성부른 콘텐츠부터 소화해 시장 여력을 갖춰놓고 난 뒤 시도해볼 사안이다. 돌아보면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데에는 이 같은 상위 시장개념을 무분별하게 도입한 탓도 크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참 탐나는 장르다. 언급했듯 ‘불황에 강한 장르’로서, 늘 위기론에 빠지고 마는 불안정한 한국영화산업이라면 하나의 산업 버팀목으로서 반드시 갖춰둬야 할 장르에 속한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정확한 계산과 시장파악으로 걸음마 단계 정도는 졸업시켜줘야 한다는 얘기다. 코 묻은 돈이라는 이상스런 편견을 버리고, 면밀한 시장계획으로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 못한 폭발력 강한 시장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칼럼니스트 이문원 fletch@empas.com
이문원
fletch@empa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