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영화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며칠 전 종말론 소동으로 잠시 유명해진 패밀리 라디오의 해럴드 캠핑이 지구 종말의 날을 5개월 연기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종말의 날은 그대로 두고 일정만 바꾸었다. 휴거는 안 일어난단다. 5월 21일에 일어난 건 영혼을 심판하는 날이어서 사람들이 못 느낀 거란다. 종말도 저번에 예언한 것과는 달리 5개월 뒤 갑자기 일어난단다.
물론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10월 21일에도 지구가 망하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 그날이 되면 그는 다시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번 일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다. 그는 1994년에도 지구가 망한다고 호들갑 떨었다가 망신을 당한 적 있다. 그는 이제 89세. 앞으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평생 성경 들고 엉터리 계산만 하다가 세상을 뜨는 거다.
아마 주류 기독교인들은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경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우행에서 과연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몇천 년 전에 신이 지구를 창조했다고 믿는 창조론자들과 해럴드 캠핑 사이의 간격은 거의 무시해도 된다. 양쪽 모두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거기에서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말해주는 정확한 숫자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모두 요한계시록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문서를 사도 요한이 썼으며 지구의 종말과 인류의 심판을 예언한다고 믿는다. 캠핑의 실수는 금방 들통날 현재의 날짜를 읽었다는 것뿐이다. 이 차이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긴 믿는다는 행위를 물고 늘어지면 여기서 안전하게 빠져 나갈 사람은 없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 이상 어처구니 없는 것을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UFO를 타고 온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한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끈 이론으로 우주만물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스티븐 시걸이 지구 최고의 스타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MB가 경제를 살릴 거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리스트는 끝이 없다.
어처구니 없다고 모두 틀리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고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처음에는 헛소리라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사는 우주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조악하고 유치해서 삼류 SF 작가들의 헛소리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일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위의 리스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믿는 어처구니 없는 것들 대부분은 어처구니 없는 엉터리다. 우리가 어쩌다가 정곡을 찌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곡을 찌른 운좋은 소수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거다.
당연히 사람들은 겸손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종교는 그 겸손을 막는다. 신자들이 오만방자하다고 믿는 과학자들은 끈 이론 보다 우주를 더 멋지게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 나온다면 겸허하게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새 이론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경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허용되지 않는다. 의심나면 다시 한 번 해럴드 캠핑을 보라.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그들은 자존심과 믿음을 지키는 쪽을 택한다.
이런 믿음은 좋은 예술의 소재이긴 하다.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현실과 믿음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음에서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이 꼭 종교적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와 같은 영화도 그런 이야기가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오늘 보다 건전한 예를 들겠다. 혹시 아서 펜의 [작은 거인]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다. 옛날엔 텔레비전에서 꽤 자주 했던 영화인데. 하여간 이 영화 후반에 보면 더스틴 호프먼의 캐릭터에게 부모나 다름 없던 사이옌 족 추장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언덕 위에 올라가 죽음의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의식을 마치고 땅에 눕는데, 아, 이런. 죽어지지가 않는다! 딱 바보스러운 코미디의 한 장면이 되기 십상이지만, 추장은 이를 우아하게 극복한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어떤 때는 마술이 듣고, 어떤 때는 듣지 않지. Sometimes the magic works, and sometimes it doesn't". 그리고 어긋난 예언을 가볍게 접은 그는 더스틴 호프먼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간다. 부디 해럴드 캠핑 역시 같은 지혜를 깨우치길 빌자.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작은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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